그제 무사히 결혼식을 마치고 오늘 인천으로 향하는 날이다. 휴가를 길게 낼 수 있는 직장 덕분에, 또 마지막 주에 있는 설 덕분에 우리는 1월 한 달 내내 쉬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려야하니 타협해서 3주 정도로 다녀오는 것으로 했다. 취업하고 나서 가장 긴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인만큼 여행지를 고르는 데 신중했다. 한국이 추운 겨울인 동안 떠날 여름나라를 찾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만 남편과 나의 취향은 극과 극이었다. 남편의 취향은 확신의 도련님이다(혹은 공주님) - 참고로 그는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 그는 여행에서 고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혼여행에 대한 로망이 많았고 평생 못 누려볼 럭셔리함을 누리는 것이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나는 모험적인 여행을 좋아한다. 누워만 있는 여행은 시간이 아깝고 럭셔리하기만한 여행에도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뉴질랜드 캠핑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이를 제안했지만 그는 신혼여행에서 캠핑이라는 사실에 기겁하고 기각했다.
1월 날씨에 여름나라를 찾는 우리에게 선택지가 크게 많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후보는 모리셔스와 마다가스카르, 뉴욕과 칸쿤 이렇게 세 군데로 추려졌다. 결국 이국적인 감성과 럭셔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모리셔스로 좁혀졌는데 1월 모리셔스의 싸이클론 영상을 보고는 남편이 팍 식었다. 칸쿤을 가기로 했지만 내 기준 너무 순탄하기만 여행지라 뭔가 계속 마음 한켠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비즈니스를 타면 좋겠다는 그의 의견을 수렴하여 예약하려했으나 두 명에 천만원이 넘는 비행기가격에 둘 다 기함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결국 돌고 돌아 우리는 (캠핑카를 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뉴질랜드로 결정했다. 비행기값이 그나마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며 옆나라 호주의 시드니도 경유할 수 있었기에 도시와 자연을 적절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가나 했던 뉴질랜드를 드디어 가 보다니 신난다 얏호! 신혼여행을 준비하며 그와 나의 여행 기대치 차이로 조금의 다툼이 있었지만 잘 해결해나갔다. 정신 없었던 결혼 준비를 끝내고 나니 우리의 눈 앞에는 한 달의 휴가가 놓여졌다. 아직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이틀 전 결혼식을 치른 후 집에 돌아와 잠을 푹 자고 짐을 쌌더니 어느새 오늘이 출발일이다. 난생 처음으로 내 돈으로 타 보는 프레스티지 좌석이었다. 비행기에 그렇게 큰 돈을 쓰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신혼여행에 기대가 많은 공주의 로망을 몇 개나 깼기에 이것만은 지켜주어야했다. 프레스티지석은 체크인도 남달랐다. 대한항공 프레스티지 체크인카운터가 독립적으로 마련되어 있고 그 곳에 도착하면 공항의 분주한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한 느낌이 들만큼 조용한 공간에서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입국심사도 별도의 줄이 있어서 더 빨리 해준다.
프레스티지의 장점은 단순히 누워서 잠을 잘 수 있고 조금 더 맛이 괜찮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다라 생각했는데, 예전보다 더 시간이 귀해진 후에 타고 나니 고객의 시간을 아껴주고 쾌적한 경험을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좋은 것에 하나씩 맛들이고 나면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 무리 없이 감수하던 것을 불편하게 느낄까 두렵기도 했다.
우리는 이날 한 끼도 먹지 않고 공항에 갔는데 비행기는 저녁 6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세시 쯤 라운지에 들어가서 괜히 맛도 없는데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집어먹어보다가 배가 불러져버렸다. 비행기를 탔을 때즈음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할만큼 속이 더부룩했다. 대강 나온 밥은 반쯤 먹고 라면도 간식도 뭣도 먹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신혼여행 기념으로 주신 샴페인도 마셨더니 푹 잘 잤다. 곤히 자다보니 두번째 밥을 준다. 이조차 많이 먹지 못했다. 계속 앉아만 있으니 소화가 안 되나보다. 다음엔 라운지 음식 따위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쾌적해서 비행기에 조금 더 타고 있어도 괜찮았는데 비행기가 곧 착륙했다.
처음 가 보는 호주, 그 중에서도 가장 핫하다는 시드니! 괜시리 두근두근했다. 호주는 세관 검사가 빡세다더니 짐 스크리닝에 걸렸다. declaration 종이에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다고 적었는데 가방이 참치캔이 있어서 잡혔나보다. 그 세관직원이 말하는 말투가 꽤나 사람의 신경을 긁었다.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는 말투로 너 디클레이션에 아무것도 없다고 적었지? 그런데 이건 뭐야? 참치지? 왜 없다고 적었어? 이런 식이었다. 시작하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좋은게 좋은거니 마무리하고 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우버를 타고 호텔까지 가는 길, 꽤나 날이 우중충하다. 1월 시드니 날씨는 확신의 여름 날씨라고 해서 왔는데, 막상 왔더니 바람이 나무를 거세게 흔들고 하늘은 먹색 구름이 짙게 깔려있다. 분명 지난 주 SNS에 올라왔던 지인의 시드니는 해가 쨍쨍한 한여름이었는데 말이다. 에그머니나 하고 날씨어플을 봤더니 우리가 머무는 시드니 4박5일 내내 비가 올 예정이다. 1월에 여름날씨를 찾아 굳이 지구 반대편 반구를 찾아왔건만 비가 올 예정이라니, 속상했다.
그렇지만 기분이 행동을 지배하게 둘수는 없지! 첫날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호텔에서 우산을 빌려서 페더데일 동물원으로 향했다. 귀여운 쿼카와 왈라비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동물원이라고 하여 꽤나 멀지만 찾아가보기로 했다. 트램을 타고 센트럴으로 가서 광역버스같은 기차를 타고 다시 한 번 버스로 갈아타는 한 시간 반의 여정이었다. 환승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이 편했는데 시드니는 대중교통이 참 편리하다.
모든 교외의 도시에서 시드니도심을 거점으로 해서 길고 넓게 뻗어나가는 방사형의 패턴으로 기차가 연결되어있는 듯했다. 버스에서는 약을 한 것 같은 어른이 있어서 조금 무서웠는데, 친절하게 페더데일 가냐고 다음 정류장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입구에서 귀여운 왈라비들을 만나고 기분이 아주 좋아진 우리. 우리가 주는 먹이를 아주 잘 받아먹는다. 동물원을 더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는 귀여운 캥거루와 새들도 봤다. 캥거루는 온라인에서 본 무서운 근육캥거루는 없고 내 키 반만한 작은 캥거루종만 있어서 그리 무섭지 않았다.
널부러져있는 캥거루를 쓰다듬기도 하고 펭귄을 구경하고 쿼카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다보니 어느새 동물원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이곳에서의 동물들은 우리나라의 동물원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로움과 넓은 공간을 누리고 있었다. 더 넓고 더 동물들의 생활반경을 고려한 환경이 동물들에게 주어졌다. 우리나라의 동물들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 언제나처럼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밥이었다. 동물원을 갔다와서 시장기가 돌았다. 조금 더 참았다가 숙소 주변 달링하버 항구의 뷰 좋은 식당을 갈까 하다가 수산시장(피시마켓)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우리나라 노량진과 비슷한 곳이었는데, 그보다 조금 더 규모가 작고 식사하러 온 사람들 위주로 꾸며진 곳이었다.
갓 잡은 싱싱한 생선들과 굴이 얼음 위에 깔려있고 바로 만든 스시와 해산물튀김이 곳곳에 놓여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 위에 끝없이 깔려있는 신선한 굴에 매료되어서 한 더즌을 사고 오징어다리튀김과 화이트와인을 골라 노상 파라솔 테이블벤치에 앉았다.
갈색 종이백에 싼 화이트와인과 플라스틱와인잔이라니, 갬성이 미쳤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앉을때 쯤 구름이 걷혀 해가 나고 갑자기 휴양지 분위기가 되었다.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와 햇살 아래 파라솔에서 먹는 굴과 화이트와인의 조화는 그야말로 휴양지. 놀러온 기분이 잔뜩 나서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았다. 호주에 왔으니 호주의 와인을 먹어보리라 하며 호주 화이트와인코너에 갔는데 대부분의 화이트와인은 뉴질랜드 산이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와인 산지가 뉴질랜드에 있으니 그도 그럴만도 했다. 고심 끝에 호주의 헌터벨리에서 만들어진 쇼비뇽블랑을 택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도착한 숙소도 너무 좋았다. 창 밖 오른쪽으로는 멀리 달링하버가 보였고 방은 너무나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식 호텔이었다. 푹신한 침구에 누워서 뒹굴뒹굴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살살 달링하버로 나갔다. 하버가 보이는 곳에서 부야베제와 가리비요리를 시켜서 화이트와인과 함께 먹었다. 쌀쌀하고 축축한 날씨에 따뜻한 토마토국물과 시원한 화이트와인이 들어가니 환상적인 조화였다. 옆테이블에서는 모녀가 군더더기 없이 생선한마리 요리와 와인 한 병을 먹고 있었는데 왠지 인상 깊었다. 우리는 회는 먹어도 스끼다시가 필요하고 레스토랑에서 생선구이만 시키는 일은 거의 없어서 괜히 생소했다. 밤이 깊어져 로맨틱한 다리를 건너 주변 마트에 와인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