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하우스 공연 보기
두 번째 날, 일찍 눈이 떠진 우리는 조깅을 하러 나갔다. 어제 달링하버를 걸으면서 조깅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삶이 괜히 여유롭고 좋아 보여서, 우리도 잊고 있던 러닝을 하러 나갔다. 항구인데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달링하버에 Barangaroo라는 선착장 때문이었다. 항구에 배가 정착하자 마치 우리나라 출퇴근 버스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배가 그들의 통근수단인 것이다! 시드니 중심부는 거의 모든 면이 물과 맞닿아있다 보니 지상교통을 이용해 돌아가는 것보다 해상교통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나중에 본 시드니의 페리 노선도는 우리나라 지하철 노선도를 방불케 할 만큼 넓은 지역을 커버하고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LPG 게임에서 물의 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를 타고 출퇴근하고 이동하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개인요트도 그 어느 곳보다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 요트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실용성도 겸비한 이동수단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직장인들 사이를 운동복 복장으로 뚫고 반대편 생태보호구역까지 갔다가 돌아왔더니 4킬로가 조금 넘는 것 같았다.
러닝복 차림으로 돌아가서 먹는 조식은 누가 뭐래도 꿀맛이었다. 씻고 나와서 내리는 비에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마시고 점심엔 스테이크도 먹었다. 시드니에서 처음 간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었는데 수준급의 와인리스트와 소믈리에를 보유했다. 우리의 취향을 말하면 와인을 추천해 주는데 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 게다가 이곳의 가게들은 레스토랑이라도 리테일가에서 크게 올리지 않아 마트에서 사는 가격에서 조금만 더 내면 좋은 음식과 페어링 해서 먹을 수 있으니 안 마실 이유가 없다. 리테일가의 최소 두 배는 받는 한국 식당들에 비하면 감지덕지다.
오늘 추천받은 와인은 그르나쉬(그르나슈)였는데 너무 맛이 좋아서 조금 후 시내의 보틀샵에 들러 그르나쉬를 샀다. 그르나쉬는 피노누아와 비슷하게 상큼한 딸기와 베리향으로 시작하는데 피노누아보다 조금 더 짙은 맛이었다. 까쇼와 피노의 사이라는 소믈리에의 묘사가 딱 맞아떨어졌다. 기분 좋은 날 마셔야지!
삼일차, 드디어 비가 그쳤다. 아침에 조깅 겸 산책을 하고 본다이비치와 아이스버그로 향했다. 아이스버그는 워낙에 멋진 사진들이 많아서 시드니에서 가장 기대한 곳 중 하나였는데, 여전히 날이 춥고 비바람이 불어 차마 수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플리스를 입을 만큼 추운 와중에도 수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대단해 보였다.
맨리비치도 들렀다. 맨리비치에서 서핑을 하고 석양을 보는 것이 목표였건만 너무 추워서 내가 가지고 온 얇은 스프링슈트로는 얄짤 없는 날씨였다.
그래도 돌아오는 페리에서 본 시드니의 관경은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오후 즈음 돌아온 시드니 중심부에서 비바람을 뚫고 들어간 식당에서 계산하며 날씨에 대해 한탄을 하자 직원도 거들어준다. 지난주까지는 30도를 넘나드는 쨍하고 맑은 날씨였는데 하필 이번 주에 기록적인 폭우가 왔다고 했다. 딱 비바람의 중심에 맞추어서 온 것이 괜히 야속했다. 뉴질랜드부터 먼저 갔다가 시드니를 올걸 그랬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에서 빗물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비바람을 맞으며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여행은 야외활동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날씨가 정말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는다. 그래도 폭우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오페라하우스가 조그맣게 옆창으로 보이는 시내 한 중간의 숙소로 옮겼다. 이전 숙소와는 걸어서 20분 차이인데도 느낌이 확 다르다. 달링하버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면 이곳은 완전 중심지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석양이 지는 것을 보러 호텔의 루프탑 바에 갔다가 (구름에 가려서 석양은 못 봤지만ㅠ) 전부터 가고 싶었던 맛이 좋은 파스타집을 갔다. ‘그라나’라는 파스타바에서 굴으로 입맛을 돋운 후 감자요리와 사워도우, 그리고 말린 미역이 올라간 파스타를 먹었다. 내 삶에서 먹었던 중 가장 맛있는 파스타였고, 입맛이 까다로운 공주도 동감했다. 시드니에서 내 인생 최고의 파스타를 만날 줄이야, 뜻밖에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참 좋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던 미역이 토핑으로 올라온 것이 신기해서 찾아봤다. 이 또한 K트렌드인가 설레발을 쳤는데 그것은 아니고, 뉴질랜드 또한 미역이 많이 난다고 한다. 남극해의 차가운 한류와 태평양의 물이 만나 미역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든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뉴질랜드의 미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모든 미역의 조상은 한국미역이라고 해서 괜히 반가웠다.
와인도 한 잔 했겠다, 오랜만에 비가 그쳐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나왔다. 시야를 들어 앞을 보니 오 마이갓 바로 앞이 오페라하우스였다. 예상치 못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에 살살 걸어서 가까이에 갔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시드니에 처음 와서 머무는 자는 모두 오페라하우스 주변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을. 이전 숙소도 만족하면서 있었지만, 시드니를 제대로 느끼려면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 주변에 있어야만 한다. 오페라하우스가 주는 그 상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멋진 건물과 하버브리지가 뿜어내는 하얀빛이 바다에 그대로 비추어져 다리가 물에 반사되었다. 늦은 밤인데도 사람들은 벤치에서 또 테이블에서 와인을 먹으며 앉아있다. 이게 바로 시드니의 진가구나 싶었다. 조명에 비친 하얀 조개 같은 오페라하우스도 (실제로는 밤껍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하버브리지가 윤슬처럼 하얗게 비치는 바닷물도 정말 운치 있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너무 좋았다. 왜 사람들이 시드니 하면 오페라하우스 하는 줄 알았다. 정말 로맨틱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이제 벌써 4일 차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지만 그래도 폭우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 걸을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날이니 서로 하고 싶은 일들을 읊어보았다. 오전엔 팬케이크를 먹고(내 소원) 오후에는 하버브리지를 걸을 거다(공주 소원). 전부터 찍어뒀던 브런치카페로 살살 걸어가는 길에 만난 하이드파크, 시드니는 도심 한복판에 공원이 곳곳이 있다. 삶 곳곳에 끼어있는 풀과 앉아 쉴 공간이 그들의 태도에 여유를 더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너무나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팬케이크 말고는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커피도 맛있고 피시 앤 칩스도 맛있다. 공주는 아직도 여기서 먹었던 피시 앤 칩스와 커피가 우리 여행 중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이 좋았다고 한다. 나도 여기 팬케이크가 가장 맛이 좋았다. 역시 시드니는 먹진국이다.
마지막날이니 시내 구경을 좀 하고는 하버브리지를 걸어 반대편 마을까지 다녀왔다. 하버브리지를 따라 30분 정도 걸었더니 색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관광객과 상업지구로 복작대는 오밀조밀한 시드니와 달리 다리 반대편에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부촌마을이 나타났다.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는 멋진 뷰의 조용한 주택가였다. 새삼 평화로움에 감탄하고 아직 덜 마른 공원 잔디에 종이를 깔고 걸터앉았다. 젖은 초록빛 풀냄새가 향긋하게 올라오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한 번쯤은 공원에 앉아서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우연찮게 지나가던 이곳에서 할 수 있어 기뻤다. 날씨도 알맞게 잠시 조금 개었다. 감성 넘치는 콘아이스크림도 먹고 사부작사부작 돌아왔더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간다.
오늘은 마지막 일정,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기로 했다. 정극은 아니고 우리처럼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이라이트만 뽑아놓은 공연라 졸릴 걱정 없이 맘 편히 예매할 수 있었다. 나름 공연이니 너무 여행객처럼 가면 실례일 것 같아 깔끔하게 입고 갔는데, 드레스업 하고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니 왠지 우리도 교양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에서 좋은 곳을 갈 때를 위해서 이런 옷 한 두벌 정도는 챙겨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연은 오페라 초짜인 우리도 즐길 만큼 잘 풀어낸 공연이라 너무 즐겁게 봤다. 인터미션 때 바다가 보이는 통창에서 화이트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우리는 마지막 만찬을 위해 서둘러 굴을 먹으러 갔다. 첫날 피시마켓에서 반한 후 4일 동안 하루라도 굴을 안 먹은 적이 없었는데도 마지막으로 다시 먹고 싶은 것을 생각했을 때 역시 굴이었다. 한국의 굴과 같았지만 먹는 방법이 달라서일까 훨씬 더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이곳의 굴은 얼음 위에 하프컷으로 나오는데 보통 화이트와인 미뇨네트 소스와 함께 나온다.
레몬즙 잔뜩 짜고 미뇨네뜨 소스 올려서 굴을 한 입에 왕 밀어 넣으면 달달하게 씹히는 관자와 새콤한 소스가 입 안에서 풍성하게 퍼진다. 마지막으로 굴을 스무 개는 먹었다. 와인도 잔뜩 먹었다. 소믈리에가 굴에 샴페인을 함께 먹으면 맛이 좋다며 샴페인을 조금 서비스로 줬는데, 정말 신세계였다. 미네랄 풍미가 넘치는 달큼한 탄산이 입안에서 팡팡 터지는 동시에 달콤 비릿한 굴의 육즙 또한 팡팡 터졌다. 첫날 인상 깊었던 사람들처럼 굴과 화이트와인, 생선구이와 샐러드를 시켰다.
들어가기 아쉬워 호텔 앞 바에서 맥주 한 잔 하고 들어가는 밤. 이렇게 시드니 안녕이다. 날씨가 좋았다면 아마 내가 굉장히 좋아했을 도시였을 텐데 흐린 날들의 연속이라 너무 아쉽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날이 개고 또 너무 로맨틱한 야경을 봤음에 감사하다. 안녕 시드니, 이제 뉴질랜드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