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스리펀에 실패하다
오늘은 뉴질랜드의 퀸스타운으로 넘어가는 날이다. 오전 9시 비행기라 아침 일찍 서둘러 두 시간 반 전 정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매한 비행기는 버진오스트레일리아. 사실 이 비행기를 예매할 때 공주와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세 시간의 짧은 비행이기에 저렴한 비행기를 타자는 나와 그래도 국적기를 탔으면 하는 그 사이에서 의견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가 예산 초과였고 한국에서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많은 돈을 지불한 후라 다시 비행기에 큰돈을 쓰는 게 부담스러웠던 나는 빡빡 우겼다. 수화물에 추가금을 내야 하는 에어뉴질랜드와 호주 국적기인 콴타스항공, 그리고 그 사이 버진아일랜드 중 고민을 하다가 콴타스를 타고 싶은 공주와 언쟁을 한 후 결국 콴타스보다 5만 원 정도 저렴한 버진아일랜드를 택했다. 짧은 비행기가 뭐 그리 다르려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공항에 도착하자 도착하자 생각보다 꽤나 번잡한 공항에 조금 당황했다. 조그만 김포공항 같은 곳을 생각했는데 시드니의 공항은 단 하나밖에 없었고 국내선과 국제선이 한 데 얽힌 복닥 한 상황이었다. 인파를 뚫고 버진오스트레일리아의 체크인카운터에 갔을 때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줄은 몇 번이나 꼬여 길게 늘어져있는데 카운터는 하나 밖에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너무 일러서 그럴 거라 생각하며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카운터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다. 카운터가 몇 개나 열려 있는 옆의 콴타스 항공 카운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말을 걸면 싸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점차 우리의 표정도 그렇게 변해갔다. 두어 시간을 기다린 후 보딩타임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체크인을 할 수가 있었다.
두 시간 반 정도 일찍 들르면 여유롭게 아침도 먹고 택스리펀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출국심사를 하고 난 후 택스리펀 줄로 뛰다시피 걸어갔는데, 이미 입국심사보다도 더 긴 줄이 택스리펀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인천 같은 키오스크를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선물을 구매한 터라 우리가 구매한 금액의 예상되는 환급금액은 약 37만 원. 미리 알아보지 않은 나의 P력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단지 한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 37만 원을 쌩으로 날리자니 너무너무 아까웠다. 혹시나 비행기가 지연될 일은 없을까 기대해 보았지만 헛된 기대였다. 미련이 남아서 조금이라도 더 택스리펀을 기다려보려 했지만 남편이 지금 비행기 탑승을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나를 게이트로 이끌었다.
자잘한 인간으로서 생돈 37만 원을 날리는 것이 어찌나 속이 쓰린 지 모를 일이었다. 이 돈이면 뉴질랜드 가는 비행기를 공짜로도 갈 수 있었다. 속이 얼마나 쓰린지 다른 얘기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기분이 좋지 않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괜히 회피하고 싶다. 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끊임없이 껄무새였다. 아침에 조금만 더 서두를걸, 그냥 5만 원 더 내고 그가 하자는 대로 국적기 탈걸, 시드니 공항 상황이 어떤지 미리 알아보기라도 할 걸 하며 반복했다.
나와 달리 남편은 금방 잊었다. 이미 지나간 일 되돌릴 수 없으니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그는 빠른 상황판단으로 찾을 수 없는 돈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행기에서도 비교적 평온했다. 만약 그의 말대로 콴타스를 탔다면 체크인이 한 시간을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을 거고 아마 그럼 택스 리펀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그는 “거봐 내가 뭐랬어”와 같은 말을 시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럴 때 나보다도 좀 많이 어른이었다.
그의 마음가짐은 돈을 버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는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함이고 돈 때문에 더 중요한 것들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의 신혼여행 중 우리의 기분과 여행 시간은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미 어쩔 수 없는 돈 때문에 기분 상해하지 말아야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평소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을 이런 곳에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쓰는 사람들. 시간과 감정과 우정과 본인이 아닌 모든 것들을 위해서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 스스로 외모를 꾸미는데나 먹는 데는 인색해도 친구에게는 후하고 엄마집 강아지의 수술에 망설임 없이 몇 백만 원의 수술비를 내는 친구, 생활비는 꼼꼼하게 아끼지만 친구의 축의로는 몇십만 원을 턱턱 낼 줄 아는 그런 친구 말이다. 돈이 많아져서 이런 선택할 상황을 피하기를 바라는 대신 돈이 한정된 자원일지라도(내 평생 그럴 것이다) 우선순위를 본인의 안위 외의 것에 둘 수 있는 그런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다.
나의 소비는 그들의 것에 비하면 구차하고 얕다. 당장 이번 겨울에만 해도 테무에서 도파민에 휩쓸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몇 번이고 샀고 아웃렛에서 쇼핑을 하다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세일을 하니 한겨울에 한여름 원피스를 샀다. 그 금액이 이미 37만 원은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상 친구의 축의나 친구의 모임에서는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내 모습이 구차했다.
이번 여행에도 응당 시간과 경험을 위해 기꺼이 지불했어야 할 곳에 쫀쫀하게 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돈을 놓치긴 했지만 경험과 관계에 내 소비의 포커스를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금 할 수 있었다. 슬기로운 돈벌이나 투자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소비도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소비하는 방식이 사람의 우아함과 멋을 만들어 낸다.
이번 일로 크게 깨달은 게 있다면 여행에서는 돈을 아끼지 말자는 것이다. 여행은 한정된 시간 내에서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고 오는 거다. 물리적인 시간을 늘릴 수 없으니 체력과 소비를 늘려서 시간을 메꿔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여행이다. 소비를 늘려서 시간과 체력을 메꾸는 것 중 하나가 여행 초에 경험한 프레스티지 좌석이었다.
단지 기내 서비스의 차이 만으로 더 많은 돈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었던 내 시야가 좁다는 것을 알았다. 더 좋은 항공사에 더 많은 돈을 내는 이유는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항공사와 접점이 있는 그 모든 순간의 서비스라는 것을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다.
체크인하는 그 시점부터 항공사는 나의 시간과 체력을 아끼는 데 모든 포커스를 맞추었다. 일례로 대한항공은 프레스티지 체크인 카운터를 아예 별도의 구역에 만들어서 빠르고 쉬운 체크인 경험을 제공했고 비행기에 타서도 최대한 휴식할 수 있도록 했다. 수하물을 찾을 때조차 수하물을 먼저 빼줘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였다. 반면 버진아일랜드는 꼭 필요한 곳인 비행기좌석을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했고 남은 비용을 고객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돈을 적게 받는 대신 나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귀한 휴가를 내고 여행을 온 만큼 시간을 아끼고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의 여행은 이전보다 더 비싼 것이 되겠다. 아무 항공기나 타고 아무렇게나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을 하기에는 예전보다 리스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는 사이 퀸스타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