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과 눈이 즐거운 퀸스타운
퀸스타운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물가가 높고도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퀸스타운의 날씨는 환상적이다. 하늘에 이렇게 예쁜 뭉게구름이 있을 수가. 저 멀리 산의 능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이 곳의 공기에 시력이 1.5배는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공기는 차가운데 햇살은 따뜻해서 그늘에는 춥고 햇살에는 따뜻한 쾌적하고도 찹찹한 날씨다. 우버를 타고 가는 길 왼쪽 창 밖으로 이어지는 에메랄드 빛의 호수가 비현실적이다. 남섬 최고의 휴양도시라는 말이 이해가 될 수밖에다. 퀸스타운은 커다란 호수마을로 날씨가 온화하고 쾌적하다.
우버에서 내리자 또다시 숙소 앞에 호수가 펼쳐졌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사람들, 호숫가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 비키니를 입고 태닝하는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 영락 없는 휴양지의 모습이었다. 먹구름색 시드니에 있다가 뭉게구름 핀 호수를 보니 빗물에 젖었던 마음이 햇빛에 빠싹 말라 뽀송해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공복인데다 사람들이 극찬을 하는 이 도시의 유일한 맛집 퍼그버거도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숙소를 나가기가 무섭게 아름다운 호수에 발목이 잡혀 시장기는 뒷전이 됐다. 새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구름과 산이 호수에 완연히 비쳤다. 호수란 산에 둘러쌓인 움푹한 곳에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여기 이 호수가 온통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말이다. 맑은 호수는 그 속에 산과 하늘과 구름을 똑같이 품고 있었다. 투명한 호수에서 아이들이 다이빙을 하고 잔디밭의 버스킹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지상낙원이 이 곳을 위해 만든 말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은 뭐가 그렇게 특별하길래 이렇게 예쁠까. 우리는 왜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매번 자연에 감탄을 할까. 내 세상을 둘러싸는 색감이 이처럼 조화롭고도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호수와 산, 그리고 하늘에 내리쬐는 햇살이 내 세상을 은빛 파스텔로 칠한다. 한참 호수를 바라보다가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버거를 사서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호수가에는 다들 호수를 보며 버거를 먹고 있었다. 버거 자체의 맛이 엄청나다기보다는 호숫가에 걸터앉아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햄버거라서 유명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이 퀸스타운의 최고 맛집은 호수일수도.
호수에는 물이 차운데도 수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드니에서 못 하고 온 수영을 여기서 하겠구나! 싶어 신이 났지만 막상 발을 담그니 너무나 차가운 호숫물에 놀라 간만 보았다. 호숫가에서 한참 멍때리며 앉았다가 호텔 마당에서 돗자리를 깔고 해를 받으며 누워 잤다가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가 보니 어느새 저녁놀이 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눈과 몸이 즐거운 이 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돗자리 펴고 누워있기, 앉아서 풍경 보며 멍때리기, 동네 산책하기. 이것이 내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방식이었다. 행복했다.
배가 고파 둘러보니 파머스마켓이 섰다. 이미 여덟시반이 넘었는데도 해가 아직 산자락에 걸려있어 거리는 활발했다. 조그맣게 음식을 파는 천막과 버스킹하는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분위기가 재미있었다. 오른쪽 산 너머로 지는 노을에 왼쪽 호수가 윤슬로 반짝였다. 한 버스커가 색소폰을 멋들어지게 불어서 이 곳의 분위기를 한참 더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노을빛이 그의 색소폰 위로 내려와 금빛 악기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다. 낭만적인 거리를 걸으며 저녁거리를 골랐고 일본인 부부가 파는 타코야키와 미국인 아저씨가 하는 조각 피자를 샀다.
체리 가판대를 지나치며 농부아저씨가 파는 탐스러운 체리 샘플을 우연히 먹었다가 평화로운 발걸음에 열정을 한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아저씨가 아침에 직접 수확해 온 싱싱하고 붉은 체리맛이 입에 퍼졌다. 그러나 현금만 받는 탓에 체리를 살 수 없다. 우리는 포기하기 아쉬워 체리를 찾아 나섰다. 결국 돌고돌아 편의점에서 체리를 찾았다. 미심쩍었으나, 막상 숙소에 와 열어보니 주변에서 금방 수확해온 것처럼 싱싱하고 알이 굵었다. 원산지를 살펴보니 이 지역에서 난 체리였다.
숙소에 도착해서 전리품들을 와인과 함께 먹었다. 시드니에서 사서 지고 온 그르나쉬라는 신대륙 품종의 와인으로 피노누아와 비슷하데 그것보다 조금 더 진한 맛이 오늘의 안주거리에 곁들이기에 딱이었다. 뉴질랜드/호주 지역의 피노누아는 유럽 와인에 비해 가벼운 편이라 밥과 먹기에는 조금 묽은 느낌이 있기도 했는데, 그르나쉬는 딱 그 아쉬운 부분을 잡아주는 와인이었다.
특히 이 날 저녁 먹은 체리는 나의 미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동안 내가 도통 느낄 수 없었던 테이스팅노트의 “체리”맛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게 해 주었다. 체리를 먹었을 때 입에 남는 과육의 맛과 향이 우리가 땄던 그르나쉬에서 똑같이 났다. 푸릇하고 상큼한 체리 과육향, 그리고 그 끝은 오크 향이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 여행 중 바틀샵을 갈 때마다 그르나쉬 와인을 찾게 했다.
또한 여행중 뒤늦게 알았는데 이 지역(센트럴오타고)은 이 퀸스타운을 포함해서 남섬 오른쪽아래에 있는 지역이며, 대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농산물로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딱 지금(1-3월)이 체리가 제철이라 어딜가든 체리가 참 크고 싱싱했다. 뉴질랜드는 참 음식이 맛이 없다지만 원물 그자체의 품질은 그 어디보다도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피노누아가 유명한 지역이라 크게 아쉬웠다. 미리 알았다면 센트럴오타고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맛있는 농산물도 많이 먹고 와이너리투어를 했을텐데,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피노누아 중 하나인 펠튼로드도 이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센트럴오타고를 벗어난 직후에 알게 되었다. 뒤늦게 안 것이 못내 아쉬워 다음번에 이 곳에 다시 와서 와이너리투어를 하기로 우리 공주와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