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호숫가로 수영을 하러 나갔다. 해가 9시쯤은 되어야 지는 이곳은 아침이 비교적 느리게 시작된다. 아침 8시인데도 호숫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발을 살짝 담그었다. 물이 차가웠지만 사람이 적어 유유자적 수영하기에는 제격이었다. 물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니 금방 추운 기운이 사라졌다. 어제 아이들이 놀던 다이빙대 위에도 올라가보고 깊은 곳과 얕은 곳을 왔다갔다 헤엄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영 후 비치타올을 깔고 누워 몸을 말릴까 했지만 아직 공기가 차가워 금새 들어와 아침을 먹었다.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조식인데 샐러드야채와 과일 등이 모두 신선해서 즐거웠다. 우리는 높게 뚫린 창 앞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주황색 낙하산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닌다. 패러글라이딩이었다! 서로 말할 것도 없이 서둘러 밥을 먹은 후 산책 겸 주변 여행사를 찾아 나섰다. 알고보니 우리가 봤던 그 산은 액티비티가 가득한 산이었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집라인, 패러글라이딩, 심지어 루지도 탈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당일 점심에도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었고 조금 비싼 금액이었지만 냅다 결제해버렸다.
아예 비교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블로그 조금 검색해보고는 호텔 로비와 길가의 여행사 한 곳만 알아보고 그냥 결제했다. 구매하기 전에 여기저기 서치하던 나였지만 어제 공항에서의 교훈으로 여행에서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배웠기에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다.
10여년 전에 갔던 인도 여행에서 필요도 없는 장식품을 사기 위해서 실갱이에 가까운 흥정을 하던 기억이 문득 났다. 몇달 전 이사하면서 버렸던 장식품이었다. 흥정을 하면서 서로 기분도 안 좋아지고 결국 아낀 돈은 푼돈이었는데 속기 싫다는 생각이 날 지배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이니까 그것을 귀하게 하고 쓸 곳 없는 감정이나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화정 언니가 말하기를 인생은 기분관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분을 관리할 수 있는 곳에는 자원을 아끼지 말아야지. 그 대신 귀하지 않은 것에는 돈도 시간도 뇌용량도 모든 것도 쓰지 않을테다. 이제 이번 여행동안 내 시간과 에너지는 즐겁고 행복한 것에만 쓰자고 다짐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곤돌라를 타러 올라갔다. 눈 아래로 보이는 호수와 마을의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만큼 아름다웠고 가시거리는 끝없을 정도로 맑게 보였다. 공기처럼 당연히 여기던 미세먼지가 없어지고 나니 세상이 얼마나 맑은 지가 느껴진다. 도착한 곳에 패러글라이딩을 접수하며 우리 너무 무서우니까 한 시간만 뒤에 오겠다고 했다.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나가던 패러글라이더가 지금 바람도 적고 사람도 없으니 지금이 적기라며 당장 해야할 것처럼 얘기했다. 홀린듯 우리는 드넓은 잔디밭으로 나갔고 갑자기 수트를 입었다. 여기 잔디밭에서 달려서 앞으로 나가면 패러글라이딩이 시작된다고 한다. 오마이갓 조금 무서웠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았다. 전문 패러글라이더가 내 뒤에 함께 타주었다.
언덕을 우다다다 뛰어가면 나를 뒤로 잡는 느낌이 드는데 그 때 멈추지 말고 뛰어가면 된다고 한다. 뛰다가 누가 뒤에서 잡는 느낌이 들어 멈칫하는 순간 남편이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멈추지도 않고 잘 간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자신감이 생겨서 우다다 뛰어가다 보니 어느 새 허공을 휘젓고 있는 내 발이 있었다. 내 엉덩이에 걸쳐진 패러글라이딩 시트가 나를 높이 띄워줬고 나는 산 중턱에서 앞으로 뻗어나와 하늘을 걷고 있었다. 낙하산이 내가 아까 서 있었던 땅을 뒤로한 채 롤러코스터를 타듯 공기를 부드럽게 글라이딩한다.
발 밑으로 높은 침엽수림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쳐가고 저 멀리 산들으로 둘러쌓인 새파란 호수가 보인다. 멀리서 보니 호수가 융기한 산들 사이에 갖힌 물웅덩이처럼 보였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나를 위로 올려준다.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바람이 없으면 위로 올라가서 다시 바람을 타고 내려오고 바람이 많으면 바람이 없는 곳으로 피하며 슥슥 하늘을 유영했다. 이 모든 게 너무 초현실적이었다. 깨끗한 공기에 햇볓을 받아 밝게 제 색을 다하는 초록 나무와 새파란 호수, 그것보다 조금 옅은 하늘과 그 아래 빨간 지붕 집들까지. 마녀배달부키키처럼 빗자루를 타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멀미가 날 때 쯤 산의 시작점 쯤 공터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수많은 줄을 능숙하게 정리하며 로라가 고백했다. 사실 아까 위에서 너무 춥고 사람이 없어서 너희에게 빨리 가자고 했다고 자기는 나쁜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너무 좋았으니 윈윈이었다. 실제로 오후에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조금 더 정신 없이 탔어야 했을거다. 아무도 없는 탁 트인 하늘에 우리만 있는 자유로운 기분은 잊을 수 없다.
산에서 내려와 렌터카를 빌렸다. 이제 우리는 남섬을 종단하여 북쪽의 끝 말보로까지 여행할 예정이다. 캠핑카를 타고 대자연을 누비고 싶었던 나와 신혼이니만큼 편안한 여행을 원했던 성민과 중간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뉴질랜드 남섬의 곳곳을 누비며 여행하기로 했다. 차를 빌리고 나니 이제 정말 여행의 시작이다. 유명한 와이너리 방문과 돌고래를 만나는 일, 벽난로가 있는 멋진 별장에 지내고 멋진 평원에서 골프를 치는 일들이 펼쳐질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