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메모리얼데이와 영광의 상처들

by 담다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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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요일, 3일간의 한국 주말도 끝나서 오늘부터는 다시 일을 한다. 바다에 나가니 유난히 사람이 많다. 몰랐는데 오늘 휴일이라고 한다. 날씨가 끝장나게 좋은 메모리얼데이다. 여기 사람들도 휴일에는 더 여유롭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메모리얼데이는 미국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큐라고 한다. 그래서 여행객도 많고 로컬 사람들도 많나 보다. 날씨도 좋고 사람도 많고 파도도 좋다. 월화수 삼일 내내 좋은 파도가 예상되었다. 오늘도 빨간 NSP보드였던 것 같다. 바로바로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점점 생각나지 않는다. 흘러가는 매일매일 아쉽고 사라지는 기억을 잡고 싶은 마음에 흘러내리는 모래일지언정 조금이라도 손에 쥐어보려고 한다.


주말 내내, 그러니까 금토일월 내내 4시간 정도 서핑을 했다. 이전에는 파도가 더 좋아도 오래가려면 3시간 정도면 족하다고 9시가 되기 전에 나오고는 했는데, 금토일은 파도가 작아서 아쉬운 마음에, 또 오늘은 파도가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서핑을 했다.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데없이 비가 조금 왔는데 너무 신이 났다. 우중서핑은 텐션을 한층 더 높게 만든다. 앞이 뿌옇게 보이는 사이에 슥슥 물을 가르고 가는 느낌!! 그렇게 왔던 비는 금세 그쳤고 어느새 무지개가 떠올랐다. 끝에서 끝까지 예쁜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 심지어 더블 무지개다. 이런 무지개는 10년 전 교환학생을 하기 위해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보고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아아 너무 예쁘고 너무 좋다. 행복해!!


오늘은 상처를 꽤나 얻었다. 다이앤 말로는 이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값이라고 한다. 어쩔 땐 비싸고 어쩔 땐 싸게 치지만 어쨌든 서핑을 하는 대가로 내놔야 할 값. 맞는 말인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이 멋진 자연의 파도를 공짜로 누리고 있지만 나의 안전을 보장해 줄 장치는 발목에 리쉬로 연결해 놓은 이 보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이 보드는 어떨 땐 무서운 흉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잘못해서 혹은 남들이 잘못해서 계속 다칠 수밖에 없다.


오늘은 특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곳에 오고 가장 사람이 많은 날이었는데 한국 양양의 물치 정도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 내가 깨지는 곳에서 보드를 놓치는 바람에 돌아오는 다이앤에게 보드를 날리고 말았다. 그녀는 피하다가 팔 하완에 리시가 감겼고 나는 너무 미안했다. 너무너무너무 미안해 다이앤 하는 사이에 파도가 한 번 더 왔고 내 보드에 나도 부딪혔다. 겨드랑이 아래를 부딪혔던 것 같은데 금세 까먹고 또 신나게 탔다. 한참 후 다른 사람의 보드에 내가 맞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다이앤의 입장이었다. 그녀의 보드에 무릎 아래를 맞았는데 너무너무 아팠다. 으윽. 그렇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많으니까 파도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다이앤의 말처럼.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괜찮다고 하고는 다시 파도를 탔다.


이런 내가 걱정인지 에드는 항상 뒤에서 보고 알려준다. 왼쪽에 사람 있어! 저기 조심해!라고. 라이딩할 때는 나도 잘 빼고 잘 피하는데 다만 말릴 때가 문제일 뿐ㅠ 그래도 너무너무 고마운 마음이다. 이렇게 매일같이 나오다 보면 좋은 점은 친구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침의 익숙한 얼굴들이 생긴다. 매일 보는 에드와 다이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오는 레네, 그리고 인사를 나누는 하는 수많은 얼굴들까지. 서로 얼굴을 아니까 서핑 오는 일이 더 정겹다. 초반에는 저 멀리 파도 라인업만 쳐다보고 있어도 즐거웠지만 이제는 적당히 얘기도 하면서 파도도 몇 개 놓쳐가면서 수다를 떠는 일이 즐겁다. 서핑샵에도 내가 매일 가니까 이제 매일같이 인사를 하는 얼굴들, 서로의 이름을 알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도 너무너무 재밌게 파도를 탔다. 일주일 내내 타서 이미 팔이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내일도 나가야 한다. 내일은 파도가 더 좋기 때문이다! 기대가 된다. 그런데 집에 와서 돌아오니 온몸이 꽤나 만신창이다.

리프에도 발이 꽤나 베여서 걸을 때마다 오른쪽 발이 아프고, 왼쪽 다리는 아까 부딪힌 무릎이 생각보다 아프다. 그리고 겨드랑이 아래 상처는 생각보다 크게 났다. 그래도 이 또한 치러야 할 값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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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이 끝나고 나면 배가 너무너무 고프다. 오늘도 후다닥 씻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뭘 먹을까 고민하며 나왔는데 오랜만에 마루가메 우동에 줄이 짧아서 그곳으로 들렀다. 바삭한 애호박튀김을 달달한 덴뿌라 소스에 찍어서 한 입 넣는다. 그리고 따뜻한 우동국물을 한 입. 아아 맛있고 따뜻하다. 우동을 먹고 와이키키로 가서 태닝을 조금 했다. 그런데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그냥 그늘으로 들어갔고 결국 그늘에서 낮잠을 잔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늘에서 자는 낮잠은 항상 달콤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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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말고 오늘이야말로 며칠 전부터 써야지 하고 벼루던 글을 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카이커피로 향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글이 술술 써진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재미있는 글이 만들어진 것 같아 친구들에게 공유를 했다. 친구들도 재미있어해서 아이 좋아. 글을 후다닥 쓰고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일을 하기 싫다. 시간이 너무너무 부족한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 써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절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일을 조금 더 짧게 하고 싶어. 우리나라도 nine to five 도입이 시급해. 혹은 주 4일제



화요일, 아침부터 밥을 든든히 먹고 나왔다. 아마도 내가 와이키키 오고 파도가 가장 큰 날이 아닐까 싶었다. 아침에 샵에 가서 보드를 빌리는데 하필 못 보던 얇실한 보드가 있어서 그것을 빌렸다. 매일매일 NSP만 타는 입장에서 NSP나 토크가 아닌 보드가 눈에 띄면 무조건 빌려보고 보는 편. 그 보드는 땅땅한 에폭시보드였는데 9.0에 엄청 슬림했다. 너비도 좁고 얇았다. 언뜻 보면 9.0처럼은 보이지 않아서 아마도 내가 평생에 타 본 보드 중 가장 얇고 작은 보드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보드를 들고 바다로 갔다! 오 마이갓 파도가 생각보다 더 크고 쭉쭉 들어온다!! 바다에서 만난 에드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내 보드를 걱정해 주었다. (그는 20년 차 서퍼다!) 어쩌면 보드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나는 괜찮아~ 했지만 패들이 쉽지 않았다. 파도를 잡을 때는 오히려 파도 힘이 좋아서 괜찮았지만 돌아올 때, 진짜 죽을 맛이었다. 바다에서 보낸 지난 20일 중 웃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면 그때는 바로 오늘 이 보드를 들고 패들 해서 라인업 나갈 때가 유일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얇실한 보드덕에 패들이 힘든 만큼 턴도 잘되고 쭉쭉 잘 나간다! 아이 재미있어라.


그렇게 한 시간쯤, 이후에는 파도가 줄어들었다. 파도가 클 때는 막상 무서워하면서도 줄어드니 다시금 새벽의 파도를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떠난 파도는 다시 오지 않는 법ㅠ 조금 줄어들었던 파도를 재미있게 탔다. 오늘은 두 세션을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아홉 시쯤에 나왔다. 피곤한 몸을 붙잡고 잠을 자려는데 이대로라면 오후 서핑은 쉽지 않겠다 싶어서 진통제를 먹고 비타민도 들이붓고 낮잠을 잤다.

여행하면서, 혹은 살면서 비타민을 이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비타민 별로 안 먹을 줄 알고 챙겨 오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월마트에서 B랑 C를 샀다. 비타민이라도 있어야 내 체력이 견뎌줄 수 있다. 체력아 조금만 더 힘을 내! 한 시간 정도 꿀잠을 자고 열한 시쯤 나갔다. 배가 고플 것 같아서 방앗간처럼 들르는 마구로스폿에 가서 포케를 먹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큰 M사이즈를 시켰다. 많이 먹어서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도 당이 당겨서 매점에서 달달한 스타벅스 병커피도 사서 꼴깍꼴깍 마셨다. 일을 시작하는 두 시 전에 후딱 많이 타야지. 언제 이런 파도가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다!! 많이 탈테다!!

다이앤도 오늘 다행히 오프라 본인도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갔는데 아무도 없다! 파도도 큰 세트가 아니면 잡히지 않는데 사람은 정말 정말 많았다. 주중인데도 불구하고 휴일인 어제의 아침만큼 많았는데, 그나마 아침 서핑은 아는 얼굴들이 많고 나름의 질서도 있어서 정돈된 느낌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오후서핑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다이앤도 보이지 않고 다른 친구들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돌아갈까 하던 찰나에 저 멀리서 다이앤이 나리~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시까지 같이 타 줘!!라고 하는 그녀에게 오케이!! 하고 다시 보드를 바다로 돌렸다. 그렇지만 역시나 사람이 너무 많고 질서가 너무 없어서 평소보다 두 배는 긴장을 하고는 다이앤과 아침서핑이 얼마나 좋은 지 얘기하며 열심히 탔다.

오늘로써 이제 딱 10일 남았는데 다이앤이 너무너무 아쉬워했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는 진짜 좋은 서프버디 같았다. 그러면서 내가 있을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계속 말해준다. 일을 구하면 6개월짜리 워크비자가 나온다고 한다. 그걸 계속 받아서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하루에 6시간씩 일하면 진짜 렌트밖에 못 낸다며 슬퍼하자 그녀는 그녀의 얘기를 해줬다. 몰랐는데 그녀는 여기 온 지 3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말 까암짝 놀랐다. 그럼 대체 몇 살이야?? 저렇게 젊어 보이는 데! 이 온 바다에서 몸이 젤로 좋고 배에 저렇게 멋진 식스팩도 있는데! 진짜 여기 사람들의 액면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처음 왔을 때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정말 쉴 새 없이 일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7일, 14시간씩.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일했고 이후 안정되었다고 한다.


항상 생각하지만 그녀는 정말 강하다. 서핑도 시작한 지 이제 딱 1년 되었는데 라이딩을 정말 잘한다. 날이 좋든 나쁘든 파도가 크든 작든 매일같이 나온 덕분이라고 한다. 그녀의 처음 서핑은 여기보다 더 거친 알라모아나 앞 "코트"라는 스폿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진짜 멋지고 대단하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냥 닥치면 하게 된다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쏟아부었다. 워킹비자보다 더 쉬운 방법은 로컬가이를 만나서 결혼하는 방법이라고. 그리고 밀리터리가이들을 만나보라며 속닥속닥 얘기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보드를 거의 붙이고 속닥속닥 얘기하는 것이 귀여웠다. 나는 그제 안 그래도 밀리터리가이가 데이트신청했는데 내 타입 아니라서 거절했어 하자 그녀가 아쉬워한다. you don't have to like him at first sight, you can learn to like him.이라고 하며. 그녀는 세상을 잘 아는 언니 같아. 세트가 오지 않는 동안은 너무 잠잠해서 이런 수다를 떨고 놀았다. 아이 재미있다.

두 시가 다 되어 간다. 하와이 시간 기준으로 2:30부터는 다섯 시까지 쭉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두 시가 다 되어 갈 쯤에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나가서 보드를 반납하고 집까지 걸어가서 씻으려면 아무리 늦어도 두 시에는 나와야 했는데 결국은 늦고 말았다. 마지막 파도를 잡아타는 것은 언제나 힘들기에. 보드를 반납하고 나자 2시 24분. 오 마이갓 종종걸음으로 후다닥 집으로 걸어가서 회의에 들어갔다. 4분 정도 늦었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세이프했다. 회의 하나에서 내 어젠다가 끝나서 9분 먼저 나와서 정말 빠르게 씻었다. 후다다닥 씻고 다음 회의를 제시간에 열었으니 이 정도면 선방했다! 그렇게 두 세션 다섯 시간을 연속으로 타고나서 일까지 하려니 힘들긴 했다. 진짜 너무 일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도 잘 견디고 일을 했다.


수건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점심시간(여기는 저녁시간) 빨래를 했는데 정신이 얼마나 없는지 빨래를 돌려놓고 올라와서 한참 있다가 문득 갑자기 생각났다. 악!! 세제 안 넣었다!! 하고 달려 내려갔지만 이미 빨래는 1분 남은 상태. 다시 한번 돌릴까 했지만 세탁기 한 번 돌리는데 3.5달러, 거의 5천 원이다. 그냥 세제 없어도 괜찮겠지 하며 건조기로 투입하고는 밤의 회의까지 겨우 견디다가 밤이 되어 후다닥 잠들었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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