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주홍빛 윤슬로 찰랑이는 와이키키의 선셋

by 담다리담

오늘은 벌써 마지막 주말, 6/3이다. 하와이로 치면 토요일이고 한국으로 치면 일요일이다. 아침에 차트가 작지만 어제 에드가 나올 거라고 해서 그럼 나도 나갈래! 하고 나왔다. 막상 나와보니 에드는 없었지만 파도는 좋았다! 친구말들어서틀리는 게 없다. 아침에는 작았지만 적당히 좋았는데 9시쯤으로 갈수록 점점 더 좋아져서 너무너무 신나게 탔다. 아마도 이번 주 수요일 다음으로 좋은 날인 것 같다.



오늘 만났던 사람 중 한 명은 쇼피파이에서 일하는데 100% 재택이라 하와이에서 산다고 한다. 원래 하와이에도 팀이 조그맣게 있었는데 팬더믹 동안 대부분 잘리고 본인과 몇 명만 남았다고 한다. 아주 부럽다가 조금 부러워졌다. 그전에 하와이에 팀이 있었을 때는 진짜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허하긴 하겠다. 잘린 사람들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이미 터전을 하와이에 잡아두었을 텐데 갑자기 다시 직업을 구하러 동부든 서부든 메인랜드로 돌아가야 했을 테니까. 물론 쇼피파이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이라면 일자리 찾는 덴 문제없을 테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선택당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같은 맥락으로 어제 트위터코리아 30명 중 20명 정도인가, 꽤나 많은 수가 대기발령(이라고 해고라고 읽는)이 났다고 했다. 그들도 청천벽력이겠다 싶다. 나라면 어땠을까? 두렵고 당황스럽다가도 어쩌면 삶을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달리던 바퀴를 멈추고 잠시 쉬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으니까. 그런 시간이 나에게는 바로 지금이고, 지금이라면 나는 피보팅 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것 같다. 누군가 한 번 찔러주기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바꿔보리라 싶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콕 찔러주는 사람이 없는 나는 그저 겁쟁이일 뿐이다. 정해진 삶을 벗어나서 새로운 길을 가기에는 왜 이렇게 두려움이 앞서는지 모르겠다. 잃을 게 없는 것 같다가도 내가 여태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이 모두 잃을 것이 되는 것이 참 막막하다.


여하튼 그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과 가장 가까웠다. 미국 메이저 이커머스에서 개발자로 돈 빵빵하게 받으면서 재택근무로 하와이에 살기. 부럽다. 나는 그를 오늘 처음 봤는데 그는 나를 몇 번 봤다고 처음보다 많이 늘어 보인다고 해줬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는 것 같다. 한 단계 점프한 느낌이다. 여전히 왼쪽으로 급하게 가려고 하면 퐁당 빠지지만 오른쪽은 꽤나 재미있게 탄다. 왔다 갔다 조절도 해가면서 파도도 놓치지 않고. 이제 로깅에 대해서도 슬슬 고민하기 시작했다. 테이크오프 했을 때 보드 위 몸통의 위치가 너무 한가운데 있어서 로깅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개선하고자 라이딩하다가 보드 뒤쪽으로 가도 아직은 뒤쪽에 치우치는 무게중심이 어색하다. 발을 한 발 떼 봐야지 망설이기만 하다가 라이딩이 끝나버린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고려할 수 있음에는 확실히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겠지.


매일같이 같은 샵을 간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그러다 보니 샵직원들도 내가 좋아하는 보드가 뭔지 기억하고 도착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보드를 꺼내준다. 오늘 아침에도 샵에서 대여증을 적고 있었더니 블레이크가 안에서 그 보드를 꺼내오고 있었다. 신나서 좋아했더니 "i like to see you smile"이라며 함께 웃어줬다. 좋은 사람들. 여기 사람들은 진짜로 친절하다. 깊이 들어가면 사람 사는 게 뭐 크게 다르겠냐만은 적어도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서 여유와 친절함이 묻어난다.


어제는 서핑샵의 짐 보관 랙에 두었던 신발 두 짝 중 한 짝이 사라져서 찾고 있었다. 신발이 한 짝만 사라진 탓에 맨발로 떠날 수도 없고 곤란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였다. 어느새 서핑 랙에 짐을 찾으러 왔던 신발을 찾는데 동참해 나보다도 훨씬 더 열심히 찾아주었다. 신발이 다닥다닥 모여있고 그 아래에는 모래와 바닷물이 섞여 축축하고 더러운 바닥에 그는 바짝 엎드려서 바닥을 살폈다. 나는 바닥에는 엎드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그의 뒤에서 미안함으로 더욱 발을 동동 굴렀는데 결국 그가 해냈다. 서랍장 뒤쪽으로 넘어가 구석에 끼어있던 신발을 낑낑 팔을 넣어 구출해 주었다. 나 혼자서라면 진짜 곤란했을 거다. 수영복 입고 반은 맨몸인 채로 바닥에 바짝 엎드리기는 진짜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이라면 가능했을까? 글쎄 아마 대부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은 바다에서도 친절했다. 오늘은 서핑하면서 조금 이상한 사람과 계속 부딪혔다. 어쩌다 보니 가까이서 테이크오프를 했는데 그는 굳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보드를 틀어 내 보드 위로 올라와서 라이딩을 했다. 내 반대편 방향에는 아무도 없어서 당연히 그쪽으로 갈 줄 알고 있다가 진짜 깜짝 놀랐다. 깜짝 놀라서 떨어졌으나 일단 그가 로컬이고 어쨌든 같이 탔긴 했으니까 미안하다고 했다. 대답은 너그러운 척 "No i just want to make sure you're okay"라고 해서 그가 실수한 건가 싶었는데, 다다음 파도에서도 또 반대방향 놔두고 굳이 내 쪽으로 위협하듯이 타서 너무 놀래서 떨어졌다. 첫 번째는 누가 드롭했다 말하기 애매했지만 이번에는 누가 봐도 그가 나를 드롭했다. 내가 피크에 있었다. 그래서 "Sorry and you know what, i‘m just gonna stay away from you"라고 하고 말았다.


별놈이네 하고 기분이 조금 상하고 말았는데 주변에서 하나씩 말을 건네주었다. 오늘 처음 본 귀여운 꼬맹이도, 오늘 처음 본 아저씨도, 아까 만났던 테크가이도 저 사람 서핑도 못하면서 이상한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마라고 해 줬다. 크게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그냥 이상한 놈한테 잠시 치였는데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한껏 더 다정해지고 한껏 더 웃고 다니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서 다니면 오지랖 넓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계속 이런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계속 웃는 얼굴로. 부끄럽게도 처음에는 이 친절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나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가', '이 친절의 근원이 나인가'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그냥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절한 거다. 나 때문도 누구 때문도 아닌 본인의 배려심과 다정함 때문인 거다. 나도 한국에 돌아가서도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에게라도 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서 친절하고 다정하고 싶다. 오지랖이라고 눈치 보지 않고 남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관심의 말과 행동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너무너무 재밌게 서핑을 하고 기름진 밥을 잔뜩 와구와구 먹고 싶었다. 그래서 전에 러닝 하면서 봤던 레인보우인으로 향했다. 여기 왔으니 그래도 최소한 한 번은 로컬 플레이트를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사람이 많았지만 엄청 많지는 않았고 믹스드 플레이트를 시켰다. 그레이비소스도 추가해서. 그렇지만 느끼함 치사량 초과로 도저히 다 먹을 수 없어서 남기고 말았다. 미국인들의 느끼함은 고작 아시안의 담백한 입맛을 가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서핑 후 먹은 처음 몇 입은 너무 맛있었다. 물놀이 후 배고픈 상태에서 갑자기 기름진 것이 들어오니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져버렸다.





이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관광객 모드로 주변을 구경하고 귀여운 스누피 인형도 사고 책을 읽으러 주변의 버블티카페로 향했다. 대만분들이 하는 것 같았는데 동아시아의 편안하고 널찍한 카페로 오니 오랜만에 너무 편하고 좋았다. 거기서 한동안 책을 읽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흥미롭다



조금 쉬고 나서 오후에는 전에부터 가고 싶었던 마이타이바를 가려고 했는데 며칠 안 남은 것도 아쉽고 파도도 너무 좋고 해서 결국 선셋 서핑을 하기로 맘먹었다. 후다닥 돌아와서 이것저것 끄적이고 선셋을 타러 나갔다, 갑자기 선셋을 탄다는 말이 예쁘다. 유난히 '선셋 서핑을 한다'라는 말을 할 때는 선셋을 탄다고 한다. 오늘의 서핑은 정말 선셋을 타는 느낌이어서 새삼스레 이 말이 예쁘게 느껴졌다. - 주황빛 선셋 윤슬을 잔뜩 머금은 바다 위를 보드를 타고 가르는 느낌, 이 년이 지나 그때의 글을 옮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


네시쯤 만조라 그 후에 파도가 좋아지겠지 싶었다. 네시에 들어갔는데 수위가 0.7m는 되어서 그런지 진짜 너무 잠잠했다. 여섯 시 반까지 10개도 시도를 못 했다. 사람도 많고 젊은이들 무리가 많아서 카오스고 무엇보다 파도가 없었다. 와이키키에서 내가 봤던 것 중 단연코 가장 장판이다. 차트상으로는 오늘 오후가 더 나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아침보다 더 좋을지 알고 한참 기대하고 나왔던 터라 슬펐다.


그렇지만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예즈라는 친구인데 엘에이에서 살면서 비디오게임스타트업에서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다. 신기하게 재택근무하는 사람들은 다 테크 쪽에서 일한다. 업의 특성이라는 것이 어쩔 수가 없나 봐. 오랜만에 나이대도 나랑 비슷하는 친구를 만나 말도 잘 통해서 재미있었다. 엄청 밝은 친구였다! 나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농담할 수 있을 만큼 영어 잘하고 싶었다.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은 해도 영어로 농담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하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는 것뿐. 한국 분들도 갑자기 저녁에 엄청 많이 뵈었다. 지금 한국 연휴라서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괜스레 반가웠다. 바람이 불면서 추워졌지만 여섯 시 반부터 갑자기 파도가 터지기 시작했고 너무너무 신나서 또 미친 듯이 탔다.


무엇보다 노을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황홀했다. 너무 멋진 노을이었다. 기나 긴 세 겹의 새털구름 뒤로 해가 넘어간다. 하늘은 분홍색이었다가 점점 주황색이 번져가면서 파도 위에 주홍색 빛깔 윤슬을 만들어 냈다. 하늘색 바다 위에 주홍빛 금가루를 뿌린 것 같다. 지는 해에서 반대쪽 먼 하늘은 주황색이 하늘색 위로 옅게 번져 분홍색이 되었다. 하늘색과 분홍색 조합은 누가 뭐래도 판타지 같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현실에 있는 것이 맞는지 생각할 만큼 예뻤다. 내 뒤로는 다이아몬드헤드가 짙은 녹색의 음영을 드리우면서 세세한 지형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이 시간까지 서핑하길 너무 잘했어.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냥 모든 것에.


이렇게 아름다운 와중에 파도도 계속 와서 라이딩하면서 황홀했다. 시간이 가고 점점 어두워져서 불안한 마음에 '이번이 마지막이야'하고 생각해도 주황빛으로 황홀하게 반짝이는 바다 위를 라이딩하고 나몀 다시 뇌가 리셋된다. 어쩔 수 없이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늘과 바다가 모두 까매지고 다이아몬드헤드가 어둠 속에 묻힐 즈음에야 나왔다.



거의 마무리해 가는 샵에 보드를 반납하고 나니 와이키키 해변 주변에 오늘도 푸드트럭 마켓이 열렸다. 바비큐 플레이트라도 살까 했는데 줄 보고 기함해서 포기하고 집으로 갔다. 아까 낮에 먹은 런치플레이트+버블티가 아직도 꺼지지 않아서 마티니나 한 잔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집 주변에는 마티니 파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조만간 떠나기 전에 맛있는 마티니를 먹으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도 너무나 완벽한 하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2. 성장하는 것에 대한 애증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