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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리담 Apr 03. 2022

패션회사를 퇴사한 후 옷장정리를 했다

패션회사 5년, 옷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내 옷방을 보면 친구들은 다른 의미로 놀라곤 했다. 같은 옷방을 보고도 이전 회사동기들은 '옷이 왜 이렇게 없어?'라고 놀랐고 대학 친구들은 '옷이 이렇게 많아?'라고 놀랐다. 나에게는 내 옷방은 어떨까? 다 정리하고 싶기도 하다가도 하나하나 보면 없는 게 생각나곤 한다.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봄자켓들을 보면 좀 밝은 색 자켓도 필요한데,, 라는 생각을 나도 하고 있다. 옷이란 모아도 모아도 모자랐다.


나는 옷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은 옷을 좋아한다. 엄마와 전화를 할 때 엄마의 목소리가 밝을 때는 단연코 쇼핑을 다녀왔을 때다. 쇼핑한 옷을 사진 찍어 보여주고 어떤 옷과 입을 지 고민을 나와 나눈다.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옷을 사러 가곤 한다. 그 뿐인가, 우리 아빠 방의 한 벽면에는 커다란 옷장이 차지하고 그로 모자라 반대쪽 벽 행거에도 옷이 잔뜩이다. 패션회사를 다니는 동안 사내판매에서 아빠에게 참 많은 옷을 사다날랐고 아빠는 그 많은 옷을 가져다주는 족족 아주 기뻐했다. 남들은 구분하지 못하는 옷이 여러 벌인데도, 더 이상 퇴직해서 입을 일이 없는 자켓류류가 잔뜩인데도 말이다. 동생도 자주 직구로 옷을 사고 항상 목걸이, 반지 등의 악세서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중 가장 유난은 나였다. 자취를 하던 대학생 시절, 원룸 옵션으로 달린 옷장으로 충분할 리 만무했다. 벽 한 면의 행거에는 언제나 옷이 잔뜩이었다. 행거가 무너질 때마다 더 큰 힘으로 꾹꾹 눌러가며 행거를 고정시켜 넘치는 옷들을 다시 걸었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옷을 사는데 많은 시간과 고민을 소비했다. 알바해서 번 돈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나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옷을 사용했고 친구들에게 옷을 잘 입는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냥 옷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내 옷장을 띠어리(미국 컨템포러리 브랜드) 옷으로 채우고 싶어했다. 다행히 원하던 패션회사에 입사했다. 띠어리를 공식 수입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패션대기업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입사해서 만난 동기들은 말할 것 없이 다들 옷을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멋지게 옷을 입는 친구들도 많았다. 패션회사에 머무르며 점점 더 세련된 옷에 익숙해졌다. 띠어리보다 훨씬 멋진 옷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회사에서 유행하는 스타일과 브랜드가 1,2년 이후 시중에서 유행하는 것을 봐 왔다. 지하철에서 그 스타일이 차츰 보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 회사에서는 그런 옷을 입고다니는 친구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빠르게 바뀌는 스타일과 브랜드를 나도 어영부영 따라하고 있었다. 또한 2-3년차 재고를 소각 전에 헐값에 판매하는 '사내판매'가 자주 열렸고 기회만 되면 가서 옷을 샀다. 유명 브랜드의 옷을 8-90%의 헐값에 구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연스레 옷장에는 옷이 더 넘쳐났다. 매년 버려도 그랬다.


그러기를 몇 년, 유행하는 스타일이나 브랜드를 보면 저건 곧 유행이 끝나겠지, 저건 길어에 2년 입겠구나, 곧 동대문에 깔리겠구나, 라는 생각을 더 하기 시작했다. 같은 하늘색 셔츠라도 핏 뿐만 아니라 단추의 색, 박음질의 색이 한동안 유행했던 것이면 내년, 내후년에는 왠지 입기가 그랬다. 보세 옷을 보면 이건 어느 브랜드 스타일이고 저건 어느 브랜드 스타일이네,, 라는 생각을 더 먼저 하기 시작했다. 옷 한 장에 최소 십만원인데 어짜피 몇 년 입지 못해 손이 가지 않을 옷들이었다.


부질없게 느껴질수록 기본템에 집착했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나이 들어서도 "내가 이십 대 때 산 옷인데~"라고 말할 수 있는 옷. 즉 더 질 좋은 옷을 사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자주 입지 않더라도 나에게 잘 맞게 떨어지는 옷이면 구매하기 시작했다. 조금 비싸도 디테일이 있거나 나에게 잘 맞는, 소장가치가 있는 옷을 위주로 구매했다. 그래도 매일같이 패션에 대해 얘기하는 회사로 출근했기에 옷을 적게 사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 피드백이 확실했다. 잘 어울리는 옷이나 핫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가면 꼭 한 두 마디씩 해 주고는 했다. 무리한 도전을 하느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입고 가도 누군가는 한 마디씩 건네곤 했다. 모두의 눈에 옷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관심사였다. 나 또한 같았다. 누군가가 예쁜 옷을 입고 오면 꼭 한마디씩 칭찬을 하고 비슷한 스타일을 다른 사람이 입은 걸 보면 '요즘 이런 게 많이 보이네~'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비슷한 걸 사기도 했다. 누군가가 입은 옷을 보며 저 체형에는 이런 옷이 더 잘 어울릴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기를 5년, 옷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유행에 진절머리 났다. 옷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옷을 샀다. 그리고 나는 이제 패션회사를 퇴사했다. 퇴사한 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났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고 옷장을 정리하며 '증명하기 위해 많은 옷을 샀었구나'라는 생각한다. 물론 아직 가지고 있어서 기쁜 옷들이 있다. 나에게 착 잘 떨어지는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굳이 내 스타일이 아닌데도 유행하니 나도 하나씩 따라 사 보고, 비슷한 니트라도 매일 출근해야 하니 같은 니트를 매번 입을 수 없어 구매한 여러 개의 니트들, 핏만 다른 같은 청바지들. 새로운 회사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을 브랜드, 아무도 다른 옷일 지 모르는 청바지와 니트들. 한 번도 입지 않은 코트와 니트들. 사내판매에서 브랜드만 보고 산 옷들. 그렇게 계절마다 정리했는데도 또 정리할 옷이 나온다.


하나하나 보며 안 입는 옷들은 거의 다 정리했다. 불편하거나 내 스타일에 안 맞는 옷들은 아무리 예뻐도 옷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격식 있는 옷들을 걸러낸다. 나는 운동화만 주로 신으니 운동화와 맞춰 착장할 수 없다면 손이 가지 않는다. 옷장에서 한무더기를 덜어내며 오래 입을 옷만 사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아니, 한동안은 옷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 옷방을 채우기 위해 나는 월급과 시간과 관심을 얼마나 쏟았었는지를 생각하면 허무하다. 정리한 옷 중에는 이사를 갈 때 따로 차로 모시고 왔었던 옷들도 있었다. 비싸고 좋은 옷이라고 굳이 아꼈지만 손이 가지 않아 결국은 버리게 되는 그런 옷이다. (아직도 언젠가는 입겠지 하고 모시고 있는 옷들이 있다.)


이렇게 옷을 많이 사면서 얻은 것들도 분명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보았고 또 시도했기에 진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어떤 옷이 내 체형에 어울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실패 덕분에 이제는 나에게 어울리는 게 어떤 건지 과거보다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핀턱(허리주름)이 들어간 와이드팬츠는 골반이 있는 내 체형을 안 예쁘게 만든다. 또한 나는 팔이 길고 상체가 가는 편이라 박시한 반팔티셔츠보다 슬리브리스가 잘 어울린다. 이걸 알고 있어서 옷을 사는데 실패를 할 가능성이 적다. 어떤 옷을 입어야 나에게 잘 어울릴지 안다는 것은 큰 자산이기도 하다. 이제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내가 추구하는 깔끔하고 활동성 있는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매치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7년 전에 산 셔츠를 아직 멋스럽게 활용할 수 있고 계절이 지나도 옷장에 입을 옷이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상에 고민이 하나 줄어든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옷을 사려고 스마트폰을 드는 간조차 아깝다. 돈을 쓰기 위해 시간을 쓰는 일이 스스로 못마땅해왔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고 열심히 살 필요도 없다. 이제 나는 옷에서 자유롭다.

 


"몹시도 좋아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무덤덤해지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 스스로를 위해 '작전 타임'을 부르고 잠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신호일 것이다."

보이스 - 스탠딩에그

옷을 한 무더기 정리한 옷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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