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에 밝혔지만
금요일 다섯 시 반, 네 시 반에 시작한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아 조급하다. 예약한 술집은 10분만 늦어도 예약을 취소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출발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다섯 시 사십 분, 드디어 회의가 끝났고 회의 내용을 1-pager에 정리하여 슬랙에 공유한 후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팀장님을 만나는 날이다. 아직도 나에게 팀장님이라고 하면 5년 간 함께한 이전 회사의 팀장님이다. 나의 첫 팀장님이자 아직까지 팀장님인. 모든 호칭이 영어인 새로운 회사에서는 리더는 있어도 팀장님은 없다.
서두른 덕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술집 건물에 들어선 순간 계단을 내려가는 팀장님을 만났다. "어 팀장님 어디가세요?" "나 담배피고 올게" 했다. 평소와 같은 대화다. 3개월 전 퇴사날이 생각난다. 김치찌개와 돈까스를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졌던 그 날과 다를 바가 없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새로운 회사에 대해 얘기하고 옛회사의 개편된 점에 대해 얘기했다. 이전회사를 떠나기 전에 한바탕 뒤집어 엎고 나갔었는데 그것에 대한 여파에 대해 듣기도 했다.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여러 번의 인사팀과 상무님 면담이 있었고 팀장님의 말에 따르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길가다가 퍽치기를 당할 지도 모른다. 얼마 안 된 사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신입 면접 당시 나에게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면접 중 가장 잘 봤다고 말해주신 고마운 옆 팀 팀장님이 퇴사하셨다. 반대로 우리팀에 새로운 팀원들이 입사했다. 나만 변한 게 아니다.
이직해서 한 가지 좋은 점은 말이다, 팀장님과 서로 이건 비밀인데 하면서 옛얘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때 그 사건에는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지금 누구는 어떤 일이 있다는 걸 알게된다. 누군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비밀인데 하며 팀장님께 내심 털어놓으며 도움을 몰래 요청할 수 있고 그의 생각들고 알 수 있다. 그 자리에 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한다. 팀장님이 나에게 내 성격이 지랄맞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의 입에서 '지랄맞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던히 모든 것을 삼키시는 스타일이라 더욱이. 하지만 그는 이미 예저녁에 나를 지랄맞은 팀원으로 보고 계셨다.
팀장님은 나를 항상 '혜정' 혹은 '혜정프로님' 하고 불렀었는데 오늘은 '야 혜정아' 하고 불렀다. 마음 속으로 좁혀진 거리를 이렇게 호칭으로 표현한다. 성격은 드럽지만 나를 팀원으로서 아주 좋아했다고 속마음을 얘기했다. 하지만 좋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도 알려줬다. 배치 받은 후 한 2년 간 내가 방치되어 괴로워했던 것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어떻게 헤쳐나갈 지를 지켜봤다고 한다. 그게 대체 무슨 마음이람.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언젠가의 시점을 그는 기억한다. 내가 개발리뷰에서 깔끔하게 리뷰를 하고 온 날이었다고 한다. 그 때즈음부터 그는 나의 기획에서 자신감을 느꼈고 그 즈음 나를 보며 기획자가 되었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내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팀장님이 몇 번이고 나에게 '너는 언제든 너가 원할 때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하셨었다. 그 때는 내가 조금 더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팀장님은 오늘도 그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 때 그 얘기를 했던 건 진심이라고, 그렇게 방치되어 괴로워하던 너가 이제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팀원이 되어 내심 뿌듯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진짜로 나의 능력을 그렇게 높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은 가고 싶은 회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똑똑하고 시야가 넓다고 인정하는 분이 나를 높이 쳐 준다는 것이 감사했다. 사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어를 자유자재로 하지도 발표를 잘 하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새로운 직장에서 나를 멋있게 생각해 주는 분은 아무도 없다.
9시가 되어 나가달라고 두 번이나 얘기를 들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로나시국의 시간단속이 야속하다. 노트북을 가지러 회사로 돌아가신다는 팀장님께 그럼 저도 거기서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했더니 베시시 웃으며 "진짜?" 하신다. 그렇게 도란도란 팀원 시절의 불만들을 토로하며 회사 앞에 도착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아 회사앞에서도 한참을 서서 얘기하다가 헤어졌다. 오늘 이야기한 내용들은 모두모두 비밀이라며 서로 다짐했다. 오늘은 아무 부담 없이 술을 얻어먹었다. 아빠한테 얻어 먹듯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얻어먹었다. 오래지 않아 다시 연락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