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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물이 Dec 06. 2021

1. 나만의 시간

백수가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직장 생활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내는 에너지와 백수가 되고 나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퇴사를 하기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대세의 흐름을 따라 예뻐지기 보다 건강해 지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주식 시장의 시드머니 처럼 늘어 가는 나이 대비 떨어지는 체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퇴근 후 피티와 필라테스를 병행 하며 운동을 하였고, 주말에는 sns를 검색하여 한 시간은 족히 줄을 서야 간판이라도 구경 할 수 있는 맛집이나 카페를 탐방하거나 아주 가끔 체력이 비슷하지만 운동은 전혀 하지 않는 친구와 목숨의 위협을 느낄때가 되면 등산을 다녀오곤 했다. 노안 인지 고달픈 업무 때문인지 모니터가 흐릿하게 보이던 날에도 어김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헬스장으로 갔고, 과음한 다음날에도 영혼이 가출한 육체를 이끌고 태연하게 출근을 하였다.


나는 이때쯤 내가 제법 부지런하고 이만하면 시간을 꽤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마다 업데이트되는 인바디의 수치, sns에 올린 사진들이 근거가 되어 주었다.

그랬기에 퇴사 후 한달 간은 그간 열심히 살았던 스스로를 위해 계획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때론 알차게 때론 빈둥거리면서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방 구석 어딘가에 박혀 있을 먼지 쌓인 양말 한 짝처럼 가입만 해놓고 방치했던 넷플릭스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밤을 새기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또 너무 나태 해 질 것 같은 날에는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하기도 하고 근교로 훌쩍 여행도 다녀 왔다.


나름 낭만 적인 일상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묘한 증상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 집 밖에 나갈 때면 나가야겠다는 어떤 결심을 하며 외출을 했고, 새로 등록한 발레 학원도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면서 왠지 원장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민망함이 스물 올라오면서도 미루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뿐인가. 당일 사먹은 샐러드가 원인인지 위염과 급체로 태어나서 처음 응급실도 다녀왔다. 저녁 시간에 운동 겸 걷기 위해 가던 공원도 물 미역처럼 늘어지는 걸음걸이에 길을 나섰다가도 급히 편의점으로 우회하여 제로콜라를 사는 것으로 양심을 퉁 치며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런 날은 스스로를 향한 혐오로 자책 하며 잠을 뒤척였다.


아마 나는 이때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중 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 했던 일상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저 자유가 주어졌을 뿐인데 왜이리 하루하루가 녹록치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불안’ 이었다.


나는 백수가 되었지만 당장 쓸 돈은 충분했고, 모아둔 돈과 퇴직금도 있었기에 이직에 대한 생각은 몇 달 동안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소리 없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치우지도 그것에 완전히 짓눌려 지지도 않은 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나는 자유를 얻은 날 불안도 함께 얻었다. 이 두가지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자유에 정신이 팔려 뒤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내뿜고 있던 불안에 대해서는 외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서야 그림자에서 해방 된 불안과 함께 사는 방법을 택해야 했고, 무너지는 나를 세우기위해서는 시간도 에너지도 이전과는 다르게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무리하게 시작하려 하기보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몸을 비축하는 동물들처럼 철저히 소량의 에너지만을 쓰며 몸의 계절을 비축해야 할 때라는 것을. 직장인의 나는 일과 여가시간을 적절히 통제하는 사람이었지만 퇴사 후의 나는 갈 길 을 잃은 사람처럼 시간을 헤매며 구멍 난 독에 새는 물처럼 흩어지는 에너지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아주 작게 잡았다. 집 근처 공원에 있는 트랙에서 최소 다섯 바퀴만 걷고 오기, 외출 할 때 쌓여 있는 빈 택배 박스나 재활용품 버릴 것 하나는 꼭 들고 나가기, 한 번에 청소하기 보다 구역을 나눠서 청소하기(예를 들면 오늘은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기, 내일은 건조대 정리 하기)등 나의 하루는 예측 가능한 만큼 작고 소소해져 갔지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어떤 날은 매번 가던 길 대신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도 했고 동네에 인테리어가 아기자기 하고 예쁜 작은 카페나 혼 밥 하기 좋은 맛있는 쌀국수 가게가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다.

공원에서는 햇빛이 덜 드는 멍 때리기 좋은 벤치는 어디인지, 노을이 멋있게 물드는 시간은 언제쯤인지, 가볍게 툭 연락하기 편한 사람은 누구인까지도.


나만의 시간으로 내가 얻은 것들은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고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

일상의 루틴,

마음이 가는 사람으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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