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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 Nov 02. 2020

부지런한 게으름


이제 익숙해진 생활이라 생각했지만,
그 익숙함은 새로운 것을 익혀서 만든 익숙함이 아니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생긴 예전 모습의 익숙함이었다.


가정주부생활을 시작한 지 2년 반 정도 지난 시점에서 난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지니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써 부정해보지만 부정할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부끄러운 민낯뿐이었다.



이야기 시작은 여전히 변명으로 시작해 본다.

요즘 나는 집안일을 하면서 모 회사 일을 돕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이 온라인 관련 바이럴 마케팅과 홍보 및 마케팅용 디자인을 하고 있다. 아직 고정적인 수익을 낳는 일은 아니지만, 집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적당한 일이다. 그런데 일에 대해 집착이 많아질수록 집안 일보다 외부 일에 더 신경 쓰다 보니 자연스레 집안일은 뒷전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도 일이라고 다른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당연히 집안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최근에 감기 기운도 한 몫했으리라...

 

지저분해진 집안 꼴로 인해 문제가 된 것은 아내가 힘들게 일하고 쉬는 일요일 아침부터였다. 요즘 딸아이 방은 늘 골칫거리다. 지난 주도 지지난주도 연이어 아내는 방을 어지럽히는 딸아이를 나무란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았고, 그런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나는 아내에게 불만을 토로했으나 이 모든 사태가 나로 인해 생겨난 상황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일도 하면서 집안일도 같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일을 하면서 집안일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아내의 지적에 솔직히 처음엔 매우 서운했었다.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순간에는  매일 같이 일찍 일어나서 출근을 하는 아내를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 등하교 시키고, 시장 보고, 빨래하고, 그리고 청소도 하는 나는 아내의 꾸지람을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바대로 살았을 뿐,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나와 내 아내는 살아가는 양식이 많이 틀린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는 늘 사용하는 물건은 주로 늘려 놓는 편이다. 하지만 내 아내는 다시 꺼낼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도록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일할 때도 나의 성향은 그랬다. 책상은 늘 업무철과 자료로 복잡했었다. 논문이라도 쓰는 날이면 수십 가지 자료를 늘여 놓고 복잡하게 일을 했었다. 그 버릇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이다.


처음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괴로웠지만, 결국에 그 괴로움이 부끄러워서 생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나는 이제까지 바뀐 적이 없었다. 그저 그 정도가 약했을 뿐. 아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게 꾸지람을 듣는 걸 보면, 그동안 참으로 나만 알고 살은 셈이다. 아마도 한동안 습관화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또 이번처럼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끄러운 민낯을 알았기에 조금이나 변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나 자신은 어찌 보면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라 볼 수 있지만, 또한 반대로 매우 게으른 사람일 것이다.


많은 일을 하고, 새로운 것을 준비하면서 집안일도 부지런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게을렀고, 게으른 사람이었다. 하루에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정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부지런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지런해 보이고,
게으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게을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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