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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 Oct 19. 2022

방관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글을 읽다가 좀 특별한 글을 접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가 학교에서 같은 반 학생들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힘겨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집중하며 읽어보았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러 명이서 동시에 괴롭히지 않지만,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괴롭혔다는 내용이다. 

괴롭히는 방법을 보면, 의외로 치밀해 보였다. 


- 대화를 하려 하면 욕하고 달아나거나 신경질을 부린다고 한다. 

- 교실에서 서 있을 경우도 서 있지 말라고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다고 한다. 

- 앞 길을 막는다면 짜증을 부리거나 밀친다고 한다. 

- 모둠 시간에 의견을 제시하면 못 듣는 척 또는 짜증을 부린다고 한다.

- 화를 내도록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인상을 짓거나 화를 내면 되레 화를 낸다고 선생에게 이르거나 성질을 부린다고 한다. 

즉, 자기들은 해도 되는 행동을 그 아이가 하면 안 되는 식으로 몰아가는 괴롭힘이다. 

(학교 측에서는 담임선생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일이며, 피해 아이의 주장이라며 모두 정황 증거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이 많았고, 무엇보다 피해 학생이 괴로웠던 것은 담임선생의 태도였다고 한다. 

담임선생은 학생들끼리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통은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리고, 교실에는 학생들만 남아 있어서 결국에는 담임선생이 없는 자리에서 일이 터지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된 선생의 태도는 피해를 본 한 아이보다 다수의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마치 한 명을 두고 나머지가 거짓으로 일관하면 그 한 명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모양새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당연히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 바로 가정 문제일 것이다. 아이의 말과 행동은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집단을 이루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모습은 고스란히 가정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무엇일까? 

모든 학교 선생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교 선생에 있다고 본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선생님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면 가르치고 난 뒤 아이들이 헤아릴 수 있도록 직접 지도편달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지도편달 중에 편달이라는 용어가 채찍으로 때린다는 말인 만큼 현시대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지도편달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을 지켜본다거나 잘잘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이들에게 대화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학교 선생도 직업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선생이라면 적어도 형평성을 두고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온라인을 통해서 접하는 많은 선생들의 모습은 형평성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여서 상당히 아쉽다. 하긴 형평성이라는 가치관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큼 생활에 주도면밀한 면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고를 평가하는 데는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일인 만큼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해지고 싶은데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이들을 관찰하고, 지도 편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한 아이에게 잘못에 대해 꾸중하면 그 일이 고스란히 학부모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직업상 애로사항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예전과 다른 모습, 어쩌면 이 또한 다른 피해로 인한 결과 아닐까? 


그래도 가능하다면 기준을 가지고 잘잘못을 헤아릴 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A라는 친구가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A로 인해서 나머지 학생들이 싫어한다면, 나머지 학생 대신에 A학생에게 오히려 꾸중하며 참으라면서 문제를 넘기려는 모습, 

이런 모습을 반복하게 되면, 결국에는 A보다 나머지 아이들이 다음에도 그리해도 된다고 믿으며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방관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 법이다. 




학부모와 싸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과 싸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방관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형평성 있게 행동하라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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