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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사무라이와 닌자

우리 모습을 닮은 기득권자와 피기득권자 이야기

by 공삼

아내와 딸이 얼마 전부터 귀멸의 칼날의 팬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둘이서 손잡고 귀멸의 칼날 무한성 영화를 보러 다니고, 지난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TV에서 귀멸의 칼날을 방영하는 덕에 아내와 딸은 하루 종일 귀멸의 칼날을 보게 되었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나는 그러려니 했다.

일단 아내와 딸이 좋으면 OK이니까.


사실은 나도 귀멸의 칼날 무한성을 본 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봤던 부분은 탄지로의 아버지가 탄지로에게 고수가 되는 방법을 알려 준 대목과

하쿠지가 다시 옛 기억을 찾는 모습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의 내러티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앞 이야기는 나의 현 모습을 반성케 했고,

마지막 하쿠지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눈물 맺히게 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도 알지 못했고,, 더군다나 왜 귀멸의 칼날이 그렇게까지 인기가 있는지는 더욱더 몰랐다. 그저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잘 구성된 애니메이션 정도로 이해했다.



일요일 하루 종일 아내와 딸은 연속 방송을 하는 귀멸의 칼날을 보았고, 그 모습을 보고 절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2019년에 처음 나온 귀멸의 칼날을 보았고,

단순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건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사물을 비유적으로 담은 작품이다라고...



존재하지 않는 사무라이 vs. 닌자

내 눈에는 혈귀는 다이쇼 시대의 '사무라이'였고, 귀살대는 '닌자'처럼 보였다.

여기서 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반인이 사무라이를 대적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무라이를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닌자'라 봤다. 게다가 귀살대 형성과정을 보면 매우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사무라이와 닌자라고 표현해지만, 좀 더 넓게 보자면, 기득권자들과 피기득권자들의 갈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이쇼 시대의 사무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사실 메이지유신 때 사무라이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서상 여전히 사무라이는 남아 있었고, 게다가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칼대신 제복, 계급, 규율을 상징하는 자리를 차지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세월은 변했지만 일본 문화에서 여전히 남아 영향력을 발휘했으리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9년에 방영되고, (물론 만화책은 더 일찍 나왔겠지만,) 2025년에 영화로 나온 무한성을 비교할 때 한결같이 고컬의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애니메이션은 정말 잘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만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실사로 나왔을 법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실사였다면, 그 감동은 반감했을 수도....



혈귀라는 존재를 두어 단순히 처절하게 싸우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혈귀라는 존재를 잠시 덮어두면 우리 사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접하는 독자들은 알게 모르게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으로 더욱더 몰입할 수밖에 없는 '귀멸의 칼날'이 아닐까?


아직도 혈귀가 되기 전의 여동생을 등에 업고 뛰는 탄지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나이 50대에 귀멸의 칼날 덕에 적잖은 생각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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