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일산 방향으로 가거나, 올림픽 대로를 타고 서울을 가로지를 때 차창 너머 멀리 우뚝 솟아있는 북한산의 모습이 눈에 성큼 들어올 때가 있다. 비록 가까이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서도 웅장하게 서있는 그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북한산 바위 덩어리의 거친 경사를 헐덕거리면서 딛고 올라가 화려하고 거대한 암릉의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할 땐 공포와 비슷한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준다. 멀리 서든 가까이에서든 이 늠름하고 빼어난 산세에 부러운 마음 감출 길 없다. 도심 가까이에 이렇게 멋진 산이 있다는 사실에 서울 시민이 부러울 뿐이다.
오늘은 북한산 경치를 실컷 보고 싶어 백패킹을 하기로 한다.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북한산에서는 백패킹이 허락되지 않는다. 다행히 북한산에서 백패킹을 하지 않으면서 북한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산이 있으니 바로 노고산이다. 북한산 서쪽, 은평과 양주를 잇는 북한로를 사이에 두고 노고산이 위치해 있다.
사실 노고산은 백패커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장소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주말 노고산의 풍경 사진들을 보면 마치 캠핑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상 헬기장은 텐트로 가득 들어찬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는 텐트 수가 줄어들긴 하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정상 헬기장은 알록달록 텐트의 불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나, 번잡한 야영이 싫어 '언제 가보나' 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 드디어 올 가을 평일 백패킹을 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차를 이용해서 백패킹을 다녔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큰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오르내리고,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긴장이 된다.
오늘은 은평에서 백패킹을 함께 할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수원에서 은평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집 근처 지하철 역에 가서 2번이나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덜 주기 위해 지하철 맨 끝 칸 벽에 배낭을 내려놓고 번호가 다른 두 지하철 노선을 갈아탈 때에도 맨 끝으로 가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고 또 많이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은평에 도착해서 친구를 만나고 나니 산을 타지 않았는데도 등산한 것처럼 근육에 피로가 쌓이는 느낌이다. 은평에서 목적지까지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산에 도착하기 전에 퍼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친구 차로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들머리는 흥국사. 한적하고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주차 공간이 있어 훌륭한 들머리 장소가 되어 주는 곳이다.
흥국사를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들머리가 있다. 그곳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북한산이 지척에 있건만 화려한 암릉 미를 자랑하는 북한산과는 다르게 노고산은 겉으로 솟아난 바위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육산이다. 덕분에 산행하기엔 수월한 편이다. 가끔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 깔딱 고개가 있지만 그 급경사만 지나면 대체적으로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이 나타나는 코스다.
흥국사에서 시작하는 등산코스는 나무숲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구간에서 북한산을 볼 수 있다. 나무 숲 사이로 북한산 사령부의 모습이 보이다가 가끔 조망이 터지는 지점이 있다. 가빠진 숨을 고르고 물 한 모금 마시면서 경치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하다.
제법 오랫동안 걸었다는 느낌에 이제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겠거니 생각했는데, 아직 1.8 km나 더 가야 한다. 초행길은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건너편으로 북한산 암봉들이 늦은 오후 햇살에 한동안 반짝이다가 그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마지막 저녁 노을빛에 다시 노랗게 불타오른다. 그 불빛을 마지막으로 사방이 점점 어두워진다. 오랜만에 하는 야등이다. 올봄 4월에 사용한 후 다시 꺼내 든 랜턴 불빛이 꺼져가는 호롱불처럼 영 시원찮다. 5개월 이상 방치하는 동안 건전지가 거의 방전 상태인 줄도 모르고 점검도 하지 않고 무작정 들고 온 내 불찰이다. 다행히 캠우의 랜턴 불빛은 깜깜한 산속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만큼 밝다. 새까맣고 선선한 공기로 가득 찬 등산로를 친구의 랜턴 불빛에 의지해 무사히 정상까지 도달했다.
추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름달 수준으로 밝은 달이 정상 헬기장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헬기장 구석구석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불빛을 조명 삼아 텐트를 설치하고 이제 산속에서 여유를 즐길 시간이다.
비교적 밝지만 새까만 밤하늘에 침침한 듯 시린 달빛. 발 아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에서 올라오는 화려한 도심의 불빛. 하늘에서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과 땅에서 하늘로 침범해 오르는 사람들의 불빛이 만나는 곳에서는 북한산의 실루엣이 또렷하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중심으로 우뚝 솟은 북한산 사령부. 어두운 밤에도 그 모습은 당당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삼각산이라는 옛 이름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직관적이고 절로 고개가 끄덕이는 이름이다. 언제부터 이름이 변경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눈 앞에 펼쳐진 그 모습을 보면서 입에서 자연스레 튀어나온 이름은 "삼각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눈 아래에 펼쳐지니 마치 그 세상을 잠시 떠나온 기분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사람, 차들로 북적대는 번잡함을 두고 이렇게 산상 세상으로 올라오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서늘하고 맑은 밤공기도 정상에 가득하여 상쾌함을 더욱 부추기고, 정신은 맑고 또렷하다. 정신만 또렷한 게 아니다. 뱃속도 허기가 졌음을 또렷하게 알려오고 가볍게 준비한 저녁은 역시나 꿀맛이다. 수저를 챙기지 않아 친구의 나무젓가락을 빼앗다시피 집어 들고 먹어서 더 맛났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수다 시간은 끝나고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들었나 싶었는데 그 야밤에 한 분이 홀로 올라오셨다. 이 곳은 평일에도 전세캠이 쉽지 않은 곳임을 새삼 깨닫는다.
기나긴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동틀 시간이다. 북한산 사령부 동쪽으로 붉은 기운이 깔린다. 인공의 색 재료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듯하다. 색감이 이렇게 고울 수가 없다. 붉은 기운은 서서히 노랗게 변하더니 둥그런 불덩어리가 드디어 치솟아 오른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동안 자연은 매일 태양을 하늘에 올리기 위해 긴 시간을 뜸 들이고 색을 바꿔가며 하늘을 덧칠하는 세심한 정성을 보인다.
아랫동네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높이 솟은 태양 아래 북한산의 모습이 또렷하다. 서둘러 철수 준비를 마치고 이제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하는 동안에도 계속 눈에 들어오는 북한산의 모습. 이번 산행을 하는 동안 원 없이 쳐다보아서 당분간은 그리운 마음이 덜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