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경기 Day 1, 격돌

[좌충우돌, 국제 도핑검사관 활약기]

by 이건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모여 전체 브리핑을 시작으로 대회 첫 날을 열었다. 도핑관리실에 배정된 식구를 헤아려 보니 무려 20명이나 된다.



시료채취 인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검사도 많다는 것인데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총괄 책임자로서 업무 배정을 하면서 고민스러운 점은 검사의 완결성(Integrity)과 효율성(Efficiency) 사이에서의 적절한 조화를 유지하는 일이지만 그런 생각도 육상 종목에서는 거의 사치에 가깝다.


다른 경기장에 비해 많게는 세 배 가까운 압도적인 업무량이 멀쩡하던 사람들도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일이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육체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마일리지처럼 쌓이면 오해와 미움도 비례해서 증가하는 법이다.


그래서 첫 만남의 미소를 대회 마지막 날까지 일관되게 유지해 나가는 일은 여간 내공이 높은 수준이 아니면 대체로 철저한 패배를 경험하곤 한다.


특별히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검사관에게 직접 검사하지 말고 베트남 검사관들이 검사하는 것을 보면서 실수하는 부분들을 바로 수정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지시하고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육상은 다른 프로스포츠처럼 단일 종목의 경기가 아닌 다양한 세부 종목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한쪽에서는 장대높이뛰기와 창던지기,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남. 녀 200미터 결승전이 진행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임 검사관의 경우 선수의 동선은 물론이고 미디어의 위치, 선수를 통지하기 위한 최적의 자리 선정, 다른 관계자와의 갈등 조정, 시상식 일정 등 큰 틀에서 진행상황 전반을 꿰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오후 3시 또 다른 회의가 시작됐다. 갑자기 한 베트남 검사관이 의견을 제시한다. 오전에는 우리가 일을 다했으니 오후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검사를 하라는 것이다.


내 일이 너무 쉬워 보였던 것일까?


이번에 배치된 베트남 도핑검사관들은 모두 현직 경찰로 구성되어 있다. 법의학 과학실 소속으로 제법 계급이 있는 까닭에 남다른 자부심과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위에서 임명한 선임 검사관에게 우리가 현장을 정리할 테니 국제 검사관들이 검사를 맡아서 하라는 도발에 중간에서 통역을 맡은 학생이 무척이나 곤란해하며 연신 몸을 낮춘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다. 열린 토론을 환영한다는 정치적 멘트를 던지며 한번 당해봐라 하는 속 좁은 복수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역할이 바뀐 오후가 그들에게 절망으로 다가가기까지는 불과 채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현장을 장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계속되는 의무분과 임원의 요구는 왜 굳이 남들이 다 마다하는 선임의 역할을 하려고 했을까 하는 잘못된 결정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었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서야 비로소 오전처럼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해 온다. 경기를 마치고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내 스스로가 못났다는 생각이 든다.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을 텐데 설득하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으로 대처한 내 자신이 아직도 어리석기만 하다. 그렇게 첫 번째 격돌은 너무 쉽게 패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