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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Mar 12. 2020

미군을 혼냈다.  

안전 앞에서 양보는 없다.  

미군을 혼냈다.

해마다 이맘때면 기숙사 소방훈련을 실시한다. 소방훈련은 화재경보설비를 작동시켜 불이 난 것처럼 상황을 만든 뒤 미군들이 대피하는 것을 평가하는 훈련이다.


Dormitory라고 불리는 미군 기숙사.


기숙사 내부 화재경보시스템.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존재한다.


우선 대피훈련은 예고 없이 불시에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 대피할 때 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대피로 인한 제2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 화재경보가 울리면 가급적 3~4분 이내에 대피해야 하는 것, 대피하다가 혹시라도 잊은 물건을 가지러 건물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 것, 대피한 후에는 지정된 장소로 가서 인원체크를 받는 것, 건물 관계자는 안전한 곳에서 소방서에 전화해 정확한 건물명과 자신의 이름, 그리고 연락처 등을 알려주는 것, 마지막으로 소방서의 "All Clear! (상황 종료!)" 신호가 있은 후에야 건물로 들어오는 것 등이 주된 평가항목이다.


안전을 위해서 대피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그것도 상황이 좋을 때나 하는 말이다. 정작 잠자는 시간에 울리는 화재경보는 말 그대로 '짜증 유발자'가 된다.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에 퇴근해서 곤히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야 하는 소방검열관의 입장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평과 짜증이 가득 찬 미군을 상대해야 할 일도 종종 생긴다. "깨어줘서 고맙다"는 비꼬는 말 (Sarcasm)은 애교 정도로  해두자.  


언젠가 뜨거운 여름날 오후, 한 기숙사를 방문했다. 미리 약속을 잡은 건물 매니저와 함께 화재경보를 작동시키고 대피시간을 측정했다.


소방훈련은 우수 (Outstanding), 만족 (Satisfactory), 그리고 불만족 (Unsatisfactory)로 구분해서 평가한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와 Satisfactory로 점수를 주고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욕, 그렇다. 바로 그 욕, 'Fuck'이란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잽싸게 사라져 버린.


함께 있던 미군 흑인 매니저도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다. 주변의 미군들에게 그가 누구였는지 물었지만, 사실 알아도 모르는 것이 사는 길 아닌가. 어쩌면 상당수는 그 욕을 통해서 잠을 깨운 것에 대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가 화가 난 것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피곤해서 부린 투정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정도가 심하다. 기숙사 매니저에게 미군을 총괄하는 주임상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화로 오고 간뒤,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한 흑인 주임상사가 기숙사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악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화재경보를 다시 울려 욕을 한 그 군인을 찾고 싶다는 제안에 선뜻 동의한다는 의사를 보내온다.


그렇게 80 데시벨이 넘는 화재경보가 다시 한번 건물을 휩쓸고 군인들은 훈련을 받은 대로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무더운 날씨와 대조되는 싸늘한 공기가 한 무리의 미군을 감싼다.   


드디어 반격이다. "조금 전 누군가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F'자로 시작하는 말도 했는데 누구인지 용기 있게 나오라."라는 말에 백인 군인 한 명이 손을 들며 나온다.


아직 앳된 얼굴의 그 친구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는 주임상사의 말에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다.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피해가 많다며 군종 속에 살며시 숨는 재치도 발휘한다.


"다른 사람은 말하지 말고 네가 화가 난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라"라고 재차 다그치자, 화재경보 오작동이 너무 많아서 그랬다는 그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게 실수였다. 연신 부드럽게 타일렀던 주임상사의 성질을 건드린 것이다. "언제 성인이 될 거냐, 여긴 군대다. 화재경보는 언제나 울릴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장군도 예외 없이 대피해야 한다." 등등의  다소 거친 지적을 한 뒤 완전 군장을 꾸린 뒤 직속상관과 함께 자신의 사무실로 오라며 상황을 마무리한다.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대신 사과한다며 연신 인사하는 주임상사에게 종종 있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다. 그러면서도 소방훈련은 소방서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기숙사에 살고 있는 미군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도 다시 한번 짚어준다.


2005년. 미군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한다며 조금 부드럽게 하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잘못된 것을 그냥 넘어가면 나중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나 안전규정은 '누군가의 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비슷한 에피소드를 겪어야 할지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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