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일간의 무급휴가.
내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다. 내 이름이 무급휴가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결정은 존중하지만 그 선정기준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난 15년 동안 주한 미 공군은 나에게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나 역시 내 직장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마치 절절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들은 것처럼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주한 미 공군에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파격적으로 승진을 했고 그 이후로도 또 한 번의 특별승진을 하게 된다. 그동안 주한미군이 나에게 지급한 출장비만 해도 제법 될 것이다. 텍사스 3번, 괌 1번, 오키나와 2번, 보스턴 2번, 워싱턴 DC 1번, 네슈빌 1번.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미국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했었다. 적어도 이 일을 겪기 전까지는...
집과 같이, 아니 어떨 때는 집보다 더 편안하고 안락했던 직장을 벗어나 부딪힌 세상은 불편함과 암담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는 불합리한 차별도 존재했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는 3보 1배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불편한 날씨에도 국회 앞 텐트에 머물며 당신들만의 방식으로 부당함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 일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미처 그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야간 경비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 방법이란 것이 주한미군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향한 소심한 저항에 더 가깝다.
주변의 변호사들은 하나같이 주한미군의 한국인 직원에 대한 무급휴직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사되어 그 정당성에 심각한 모순이 있으니 소송을 하면 충분히 해 볼만한 싸움이라고 흥분해서 전화를 해왔으나 굳이 법정까지 가지 않아도, 설령 재판에서 승소한다고 해도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되지도 않는 곳에 힘을 쓰기보다는 저항의 대상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는 편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앞으로 경비실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중 경비지도사 공부를 하기로 했다. 아, 이런 자격증도 있었구나. 자료를 찾아보니 경비지도사는 민간경비원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전문자격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 꼭 합격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길고 긴 밤을 엉뚱한 생각으로 하릴없이 보내거나 경비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만 한다면 난 한 번 더 무급휴가라는 부당함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구입해 틈틈이 읽고 동영상 강의를 듣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다. 지난 25년 동안 몸 담고 있는 소방분야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특히 경호분야가 그랬다.
영어공부를 위해 받아쓰기를 할 때 즐겨보는 미드도 그런 류의 영화가 많았지만, 예전에 서울에서 소방공무원을 하던 시절, 대통령 경호실 직원들과 함께 구로공단을 방문한 영국 여왕의 남편을 경호했던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책에 적힌 내용들이 쉽게 다가왔다.
경비지도사 시험은 총 4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차는 법학개론과 민간경비론이다. 절대평가로 일정 점수를 받으면 통과. 2차 시험은 경비업법과 경호학을 치러야 하는데 상대평가로 진행된다. 매년 국가에서 정한 숫자에 맞춰서 (2020년의 경우 600명) 고득점자 순으로 합격자를 선정하다 보니 만점에 가까운 고득점만이 합격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
6월 15일.
75일간의 불쾌했던 휴가를 마치고 다시 본래의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바로 야간 경비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와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잡을 하다 보니 공부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경비지도사 1차와 2차 시험을 치르고 긴 여름과 가을밤을 동행해준 정들었던 내 친구들을 정성껏 책장에 모셨다. 비록 2차 시험에는 탈락했지만 1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알림 문자를 받은 것만으로도 내 저항은 충분히 가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다.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다행스럽게 비긴 것처럼 기분도 홀가분하다.
2021년.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비긴 것만으로 충분한데 또다시 싸우자고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누군가 이런 나의 비밀스러운 저항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달리 해 줄 말이 없다. 굳이 한마디 해야 한다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것뿐이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