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미국으로 출근한다] 외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북전쟁을 치르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미군부대에는 재즈와 양주가 유통되었고 커피와 부대찌개도 있었다. 배고픔을 달래주고 소위 희망이라는 '위시 리스트(Wish List)'가 존재하는 마치 신세계와 같은 곳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향수와 풍요로움의 대명사였던 미군부대는 이제 한미의 공동 임무 수행을 위한 주한미군으로 변모하게 된다. 양국 간의 소통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대등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과정 어디쯤 서 있다.
주한미군 취업을 위한 면접시험에서 확실하게 떨어지고 싶다면 미군부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 미군이 근무하고 있는 곳이니 미군부대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말이 일부 한국인 면접관에게는 진저리를 치게 만드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주한미군에 근무하는 일부 한국인들에게 '미군부대'라는 단어가 혐오에 가까운 말이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주한미군 한국인 직원들을 세대별로 분류해 보기로 하자.
1953년 미군이 주둔하던 시점부터 그들과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직원들을 주한미군 1세대로 분류할 수 있으며 현재는 모두 퇴직했다.
남북전쟁을 치르고 아무것도 없었던 가난한 시절이다 보니 미군부대만한 직장도 없었을 것이다. 초창기 미군부대 시절에는 통역이나 사환 등 단순 직무들이 많았고 창조적인 일보다는 미군의 지시사항을 잘 따르고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월급도 달러로 지급받았다고 하는데 환율을 고려해 보면 한국의 다른 일에 비해 상당히 좋은 조건이어서 미군부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고 싶을 만한 직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군기지 내에는 다른 직장에 비해 가족이 함께 근무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최근에는 다소 그 숫자가 줄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족이 함께 근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당시 미군부대는 인사채용이나 내부 승진에서 가족이나 지인 찬스, 그리고 관행이라는 이름의 불합리함과 불공정함이 공공연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보통의 주한미군 면접관은 미국 사람 2명에 한국 사람 1명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에 주한미군 3세대에 해당하는 책임자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해맑은 얼굴로 "제가 미군부대에 취업하고 싶은 동기는요..."라고 말한다면 아무리 다른 질문에 답변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주한미군 취업세미나를 하다 보면 20대 초반의 청년들도 미군부대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용했다고 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했던 말임에 분명하다.
가끔 택시를 탈 때에는 나도 서슴지 않고 "기사님, 미군부대 앞으로 가 주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면접에서는 이 친근한 미군부대라는 표현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