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와 몸에 힘을 억지로 주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다.
요근래 들어 가장 적게 걸은 날.
찾아보니 출산한 날엔 285걸음을, 출산 다음 날엔 무려 907걸음을 걸었더라.
제왕절개하고 회복하려고 꽤 많이도 걸었네.
여튼, 출산 다음 날보다도 적게 걸은 날.
모두 남편 덕분이다.
빽다방에서 아이스라떼 천원행사를 해서 한잔씩 사와 마셨다.
임신과 출산 이후로 거의 1년 이상을 디카페인만 마시다가 오랜만에 카페인을 마셔서 그런지 부작용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감과 초조함이 밀려오고 생각이 과하게 많아졌다.
그다음에는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고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오늘은 남편이 쉬는 날이었다.
머리와 몸에 힘을 억지로 주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다.
미뤄뒀던 빨래, 청소, 설거지 등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대로 두었고, 그 일들은 자연스럽게 남편의 몫이 되었다.
사실 집안일은 미룰 수 있지만, 육아는 미룰 수 없다.
아기가 깨면 안아줘야 하고, 먹을 시간이 되면 먹이고, 트림 시켜주고, 놀아주고, 재워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내가 게으름을 부린 이런 날, 남편은 기꺼이 몸을 바쁘게 움직여 육아도 집안일도 모두 도맡아 해주었다.
정말 고마운 하루였다.
남편은 세종에서 평택까지 왕복 4시간을 출퇴근한다.
새벽 6시도 되기 전에 나가서 밤 9시쯤 되어야 집에 도착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하다.
나는 육아휴직 중이고, 남편은 통근 자체로도 충분히 고생 중이라는 걸 알기에
주말을 제외하면 새벽 수유까지도 내가 전담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모든 육아를 혼자 해보려 했다.
하지만 몸이 피곤해질수록 점점 나 혼자 육아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생겼다.
하루는 퇴근한 남편에게 화를 냈다.
“아기 낳기만 해달라고 했잖아. 근데 지금은 나 혼자 독박육아 하고 있잖아.”
그런 푸념이 며칠 반복되자 남편은 앞으로 새벽 수유는 본인이 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아기 60일 즈음.
보통 새벽 3시에 아기가 깨는데, 그 수유를 남편이 맡아준 뒤부터는 내 피로도 확 줄었고, 억울한 마음도 덜어졌다.
육아는 내가 주로 하지만, 남편이 어쩌다 등장해서 도와주는 ‘귀인’이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고,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더 고맙게 느껴졌다.
그날 밤, 아기가 밤잠에 들었는데도 몸에 남은 카페인 때문인지 이상하게 우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남편에게 얘기하자 과자에 차 한 잔 하자며 나를 거실로 불렀다.
나는 말했다.
"육아도, 일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것 같아."
남편은 내 장점을 하나씩 얘기해줬다.
사람들을 잘 챙기고, 깊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나의 성향.
그리고 꼭 잘하는 게 있어야만 괜찮은 건 아니라고 위로해줬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회사에서 일도 열심히 하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듣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어.
아기가 기대고 싶을 때 기댈 수 있는 아빠, 그런 부모가 되고 싶어.”
그 말을 듣고 든든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축 쳐져있던 날, 육아를 하며 쳐져 있을 수 있다는게 어떻게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회복했다 생각하고 내일부턴 또 부지런히 걸으며 육아도 하고 집안일도 해야지.
잠시 멈춰있을 수 있게 도와준 남편에게 내일은 쉼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렇게 축 처져 있었던 하루.
육아를 하면서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참 감사한 일이다.
내일부터는 다시 걸어야겠다.
부지런히 걷고, 육아도 하고, 집안일도 해내야지.
그리고 오늘 나를 잠시 멈춰 설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내일은 내가 작은 쉼을 선물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