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은 외우되 잊어버려라
정석은 외우되 잊어버려라.
'정석'은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좋은 그림" 이라는 일종의 바둑 이론이다. 바둑을 시작하면 화점에서 날일자로 걸치는 정석부터 배울만큼 정석은 바둑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석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상황 전개를 미리 생각하는 '수읽기'가 오랜 시간 누적된 연구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둑이 존재하는 시간 동안 더 나은 기사들의 등장과 더 깊은 수읽기 연구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사실 현존하는 정석 또한 언젠가는 바뀔 과정이라고 봐야한다.)
단적인 예가, AI 의 등장 전에는 실리는 적지만 세력을 과하게 준다는 이유로 선호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초반부터 다짜고짜 33에 파고드는 수가 거의 정석처럼 된 것인데, AI가 인간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수읽기를 해내며 더 좋은 수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연구가 누적되면 더 나은 정석이 자리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때문에, 집대성을 할수록 더 좋은 수가 나오기 때문에라도 이미 정립된 좋은 수. 즉, 정석은 외워놔야 더 좋은 수를 찾아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여기서 파생된다. 사실 정석은 단편적인 상황을 사례로 들 수밖에 없기에 실전에서 등장하는 모든 상황을 소화할 수 없다. 심지어 아주 멀리서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돌이 정석 진행이 끝난 후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정석대로만 두다가는 필패한다.
그래서 수읽기가 필요하다. 수읽기는 바둑의 핵심역량이나, 어찌보면 임기응변하는 능력에 가까워보이기도 한다. 수읽기가 좋으면 보다 쉽게 묘수를 찾아낼 수 있고 여러 군데에서 이득을 챙길 수 있다. 하지만 묘수만 기대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묘수 3번 두게 되는 바둑은 패한다. 묘수밖에 답이없는 상황을 만든 것 이기 때문에.) 또, 바둑에는 초읽기라는 시스템이 존재하기에 무한정 생각할 시간이 없고, 인간의 판단력은 생각보다 엄청나지않다. (아무리 오래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읺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수읽기에만 의존하면 이론적으로는 너무 당연한 수를 보지 못한 채 악수만 두다가 패할 수 있다.
그러면 정석과 수읽기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정석은 이론이요, 수읽기는 실전이다.
정석은 초식이고 수읽기는 실전 전투능력이다.
정석만 외운 정도로는 수읽기 부족으로 인해 소규모 난투에서 대패하게되고 정석을 외우지 않고 수읽기만으로 승부하려다가는 포석과 대세에서 밀리게된다.
즉, 어느것 하나 가벼이 볼 수 없다.
임기응변이나 실전에 강하다고 해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언젠가는 대패한다.
하지만 준비가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순간의 재치부족으로도 대패할 수 있다.
마치 칼 든 애송이와 칼 없는 무사의 그것과도 같다. 누가 이길까?
우리는 칼 든 무사가 되어야한다.
좋은 무기와 다져진 지체만이 패배를 면할 수 있다.
그러니 언제나 실전에 임하는 자세로 전투를 준비하고,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며 상황에 따른 선택지를 넓혀놓는 연습을 해야한다.
결국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재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이론은 체화해야 하며, 이론을 기본으로 하되 재치를 잊으면 아니되겠다.
이 글을 어제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먼저 떠나버린 오랜 친구 해민이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