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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솜비 Jul 23. 2024

사랑과 죽음에 관한 소고

사랑, 죽음, 자유, 예술

인간 실존의 두 축은 사랑과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양태가 행동이든 심리뿐이든, 모두가 사랑을 한다. 다만 그것의 사후적 유형분류와 발현되는 방식이 상이할 뿐이다. 또한 모든 생명체는 결국엔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인간은 특이하게도 이를 늘 무의식적이나마 인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과 죽음이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사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잘 사랑하고 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의 열쇠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모성애, 부성애, 형제애, 성애(性愛), 자기애 등의 여러 가지 분류되어 있는 사랑이 실존한다고 믿어지며, 각자의 사랑들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진다. 공통적으로는 모두 사랑, 즉 인간의 아름다움과 미적 감각을 일깨우거나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이며, 그 대상의 죽음과 이별에 대한 슬픔을 잠재하고 있고, 자신의 자유를 궁극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 극단적 형태의 사랑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각 사랑의 유형마다 사랑의 시작 또는 인식의 계기는 다양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랑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본질이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이를 전제하고 시작한다. 첫눈을 보고 반해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걸려버리고, 이 때문에 열병을 앓는다거나,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한다거나, 정성 어린 선물을 한다거나, 상실의 두려움에 연적에게 질투를 한다거나, 젊음과 아름다움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지적 생산물들을 낳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배경으로 보나, 인간의 지적 호기심의 속성으로 보나, 사랑과 죽음에 대해 던지게 될 주요한 물음은 도대체 그 본질과 관계가 무엇인가이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본성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듯 나타날까? 그리고 사랑은 어떻게, 왜 발현되는가? 또한 사랑과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관계한다는 것일까? 


사랑과 죽음 담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 플라톤의 <향연>의 내용을 빌려오자. 플라톤의 죽음관과 영혼 불멸론은 사랑과 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목적으로 열린 잔치에서 사랑 담론과 함께 이루어진다. 향연 속 여섯 그리스인에 의해 여실히 드러나며, 향연에서 주장된 사랑의 6가지 담론들은 이후 사랑 담론을 ‘플라톤 철학의 주석’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여섯 번째 발화자인 디오티마의 입을 빌린 소크라테스의 입을 재차 빌린 플라톤의 ‘불멸의 사랑관’, 죽지 않는 사랑관은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이며 영혼과 이성의 고양을 통한 불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에로스가 지니는 육체적·정신적 의미를 양가적으로 조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랑은, 미치도록 불멸을 원했던 플라토닉 러브와는 상반되게, 그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내포하며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이 지점에서 사랑과 죽음 간의 선천적 연결고리가 탄생한다. 사랑은 영혼의 불멸성을 낳지만 한편으로 개별적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가사적이며 필멸성을 띠고 있으므로, 사랑 역시 가사적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굳이 전제하지 않더라도, 플라톤은 이미 마음과 육체를 구분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필멸하는데,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재된 필멸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혹은 그 필멸성까지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이다. 한편 사랑은 인간의 죽음을 전제해야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한낱 한 개의 물방울, 한 가닥의 털실로도 인간을 이별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별은 소규모의, 일시적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헤어진 연인 사이에는 서로의 존재를 쉬쉬하며 언급하지 않는다거나 더 이상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예의라는 우리의 관행은, 이별한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죽은 존재'로 파악한다는 점을 암시한다(이런 의미에서 이별을 고하는 연인은, 상대방에게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해 달라는 일종의 임종의 선언을 무겁게 부탁하는 것이고, 이를 받아들이고 슬퍼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상에서의 죽음의 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슬픔을 느낄 잠재성을 늘 갖게 된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실제 죽음을 통한 이별, 또는 소규모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 말이다. 이렇듯 사랑하는 상대의 죽음(실제 죽음이든, 소규모의 죽음이든)을 겪는다면 슬픔을 느낄 것이고, 자아적 슬픔을 희석시키기 위한 애도 작업이 필요해진다. 


특히 사랑하는 상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에, 사랑과 죽음의 관계가 더 또렷하게 나타난다. 가사자(可死者)인 인간은 스스로의 목숨을 의식적으로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살은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자살에 대한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자살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경우, 두 번째로 순전히 자살이 그 자체로 내부적 자유의지를 위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소극적으로 행해지는 자살이므로 일부는 이를 외압의 정도에 따라 타살로 보기도 하므로, 진정한 의미의 자살은 후자일 것이다. 오로지 자기 파괴가 그 자체로 목적인 경우에만 진정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주체가 스스로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인 사랑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사랑을 타자로부터 유리시키는 행위이다. 


자살은 주체가 스스로 인지하든 못하든 사랑의 외부적 대상과 내부적 자기 사랑 간의 저울질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살은 존엄한 자신의 자유와 목숨에 부과하는 책임과 무게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선택된다. 자살의 선택에는 늘 타자의 존재는 무시된다. 이러한 자살의 경향은 남성화된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은 자유의지의 발현을 통해 문제없이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가 만일 남성적이라면 늘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생전 심각하게 침해된 자신의 존엄성과 자유라는 가치를 죽음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과 자신의 존엄성이라는 가치 간의 우열을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의 불멸에 대한 의지와 욕구가 극단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사랑의 형태이며, 남성적 사랑으로부터 발아된 한 모습이다. 젊은 베르테르가 선택한 스스로의 죽음은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들이 종종 묘사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돌리기는 어렵다. 플라톤의 불멸의 사랑관은 고양된 영혼과 이성은 불멸하는 작품이나 예술에 대한 사랑을 주로 의미했을 뿐이지, 인간 개체들이 자살을 욕구하는 것까지는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살을 낳는 남성적 사랑은 사후 자신의 존엄성이 묻어난,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 숭고한 이름이 남기를 기대할 뿐이다. 실제로 남성적 사랑의 말로는 자살을 잠재하는 위태한 자기 사랑이며, 여성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배제함으로써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뼈아픈 상실과 소규모의 죽음을 안겨줄 뿐이다. 따라서 남성적 자유의 비극적 결과는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의 공멸이다. 자살의 경우 주체가 생전 사랑했던 대상의 주체에 대한 애도 작업도 다른 경우보다 어렵다. 일반적인 애도 작업은 상대방의 상실에 대한 슬픔만을 애도 대상으로 삼으면 되지만, 상대방을 자살로 상실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생전 잃었다고 느꼈던 이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상실의 애도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무게감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한 맺힌 처녀 귀신의 한을 풀어주어야만 그녀가 이승을 편히 뜰 수 있듯이, 자살은 상대방에게 애도 작업의 부담을 두 배 이상으로 지운다. 특히 상대방이 존엄성과 자유의 상실을 두려워하여 자살했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자신의 존엄성과 자유를 더 무겁게 여겼다는 뜻이 되는데, 원래 애도의 무게는 상대방의 목숨에 부과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대방이 짊어지고 극복해야 할 애도의 무게는 상대방의 목숨에 더하여 그보다 더 무거운 상대방의 존엄성과 자유의 상실에 대한 무게가 추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애도 작업은 연인을 잃은 자에 있어서 의무가 아니라 순전한 자발적 감정으로 다가올 때 더욱 부담이 배가되며, 결국 애도 작업을 실패할 가능성마저 높인다. 


일반적 이별 후 갖게 되는 애도 기간 = 상대방의 목숨이 남겨진 사람에게 갖는 크기


상대방의 자살로 인한 이별 후 갖게 되는 애도 기간 = 죽은 상대방의 목숨이 남겨진 사람에게 갖는 크기 + 죽은 상대방이 느꼈던 존엄성과 자유의 상실에 대한 무게


남성적 자유가 죽음을 내포하는 자기 사랑과 결부된다면 특히 서양 문화에서 역사적으로 여성적 사랑은 이와 달리 상대방에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며,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마저 희생할 수 있는 숭고한 종류의 사랑으로 평가되어 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대를 기다리는 자는 늘 여성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말은 이러한 맥락과 상통한다. 한편 숭고는 자유와 결부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적 자유는 숭고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자유와 숭고를 결부시킨 칸트의 주장은 비판받을 수 있다. 숭고의 근거는 자유가 아니라 여성적 희생이다. 칸트는 숭고를 존엄성과 혼동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숭고의 가능성은 칸트에 의하면 그 뿌리가 외부적일 수 없고 오로지 인간 내부의 일렁임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만일 숭고가 자유나 존엄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고 하려면, 그 자체로 인간 내부 감정이 아닌, 그 바깥에서 근거를 찾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나 존엄, ‘천부 인권’ 등은 인간 사회 내에서 관계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거나 ‘하늘’ 등 외부의 산물이다. 이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자유로워서 자유의 역사를 써 온 것이 아닌, 어떤 대상으로부터 자유를 외부로부터 쟁취해 온 것에서부터도 유추할 수 있으며, 인간 실존에 자유 대신 사랑과 죽음 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자유가 어떤 인간 실존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비롯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루소보다는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한 묘사를 지지한다). 따라서 칸트의 숭고론은 지나치게 계몽주의적이며 모순적이다. 숭고는 순전히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일렁임이어야 하며, 이는 인간 실존인 ‘사랑’, 그중에서도 자유나 존엄 등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갈망을 배제하는 진정한 사랑인 ‘여성적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요약하자면, 결국 사랑은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이 그 주체가 되어 행하는 이상 사랑 그 자체도 필멸성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상대방이 자연사하거나 사랑 자체가 소멸하여 이별하는 소규모의 죽음과는 달리, 사랑하는 상대방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경우는 남겨진 사람에게 끝없는 기다림과 크나큰 애도 작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고 남성적이다. 남겨지고 희생된 상대방은 놀랄 만큼 여성화되어 있다(실제 성별과 관계없이). 그런 의미에서 인간 실존의 축인 사랑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사랑은 여성적 사랑이며, 남성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자유에 대한 사랑을 실존에 대한 사랑과 혼동한다면 상대에게 사랑의 착각과 상처만 남길 뿐이다. 우리는 늘 상대에 대해 사랑한다고 되뇌이면서, 사실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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