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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솜비 Jun 17. 2024

좋아함에 관하여

앎, 선함, 아름다움

0. 좋아함


무엇인가를 좋아하려면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미지에 대한 선호나 동경이 단순히 착각이나 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좋아함에 대해 명확히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최소한 인지하거나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범주와 영역에 속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철학적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고 귀결시키고자 했으나 그 누구보다도 삶과 윤리, 종교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앎을 얻기 위한 인류의 길 중 가장 유명하고 편하게 걸어진 길들은 선험과 경험의 길이다. 그중 무엇이 으뜸하냐에 대해서 16세기 이후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이들은 인간의 정신과 이성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길들을, 베이컨과 흄 같은 이들은 경험이성의 실제적 논리를 각자 더 강조하앎에 이르고자 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칸트와 같이 선험적 종합명제를 필두로 인간 이성의 한계와 비판을 제기함으로서 양가적 조화를 이룬 자도 있었다. 좋아하려면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늘 내 일상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어떻게 선함을 추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압도적 자연의 대지진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 실존의 중요한 존재론적 요소를 망각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인간은 앎 없이 좋아할 수 있고, 이는 언어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편으로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이성의 역사 뒤엔 수많은 감정, 문화, 반이성, 패륜, 동물의 역사 또한 그림자 져 있다. 앎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이 이룩한 거인의 어깨를 전쟁, 종교, 욕망, 정치로 누르거나 무너뜨리려 하는 이들을 인류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 모두 각자 무엇인가를 좋아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내가 그 대상이나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잘 알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싶다.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을, 그중에서도 너를 좋아한다. 나는 알고자 하는 믿음과 선하고자 하는 바람직함을 가지고 있으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너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한다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최소한으로 내가 아는 것들, 아래에 적힌 것들이다.



1. 나


가. 앎


앎에 이르고자 하는 제일 원리를 탐구하는 공부는 철학이다. 현대 물질문명에 가장 직접적으로 기여한 여러 물리공학들은 자연과학에서 나왔고, 자연과학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철학이라 불렸. 뉴턴도 자신의 물리학을 자연철학이라 여겼고, 볼츠만이 20세기 초까지 대학에서 가르친 과목도 자연철학이었다.


철학은 그 이름의 의미와 같이 생각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은 모든 앎에 대해 메타적이다. 어떤 앎의 내용이 아니라, 어떤 형식에 대한 사유이다. 어느 대상이든 그에 대한 생각의 종류, 방법론, 범주, 그 생각을 하는 주체 등에 관한 생각과 이론을 펼치는 순간 그 활동은 철학으로 포섭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의 습성에 가장 자연스럽게 알맞은 활동이고,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을 사랑한다. 영원불멸의 영혼(이데아) 세계를 갈망했던 플라톤은 유한한 인간이 유일하게 무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사유들의 잉태를 통한 후손에게의 전달이라고 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치기 어린 마음에 내용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 읽었던 논리학 책. 더 똑똑하고, 더 많이 알고, 더 수학적이고 싶어 을분이 터졌던 감정이 생생하다.


무더웠던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던 자연과학 책. 자연과학이 어떻게 수학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레일리 산란과 원자의 아름다움만 느꼈을 뿐이었다.
2017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16번 문항의 지문. 이 지문을 읽을 때 정교해진 행복함과 무지했던 안타까움이 교차되어 덮쳤었다.


해야만 했던 수험법학 공부. 현실 세계에의 수많은 분쟁에는 논리, 합리와는 무관한 과정이 더욱 많았다.
MIT의 인공지능을 구성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코드들과 그를 구현하는 기술 습득. 무어의 법칙이 하루하루 크게 실감나고 있다 (사진: MIT).


나. 선함, 탁월함


사회를 지탱하고 지지하는 중요한 정신적 제도는 법률과 도덕이다. 법률과 도덕을 관습적으로 옳게 제정하여 사회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합의되어야 하고, 내용이 선하고 탁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목적으로서의 행복을 선함과 탁월함의 근간으로 보았다. 오늘날 원자화된 행복이 더 이상 윤리와 양립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듯한 경우를 자주 목도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의 실천이성이 선함과 관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움으로써 그 한계를 경계지으려 했다. 그의 정언명령은 도덕을 어떤 생각이나 행위 그 자체로 의무화시킴으로써 특수성과 보편성을 조화시키려 했으나, 한편으로는 옳고 선함은 인간이 당연하게 가지는 공감 능력이나 심리, 감정 따위에 기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애덤 스미스 같은 이도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나 공리가 극대화되는 방향이 곧 바로 선하고 옳다고 보는 공리주의자들도 등장했다. 쇼펜하우어, 니체, 윌리엄 제임스, 무어 같은 이들도 각자 도덕관과 선함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제시하여, 행위의 기준과 태도로서의 인간의 윤리에 관한 저마다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에 윤리는 행위에 덧씌워지는 판단 기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행위 주체에 대한 윤리적 판단 기준은 행위마다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의 주어진 삶에서 수많고도 다양한 외부, 내부적 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문화기술지적 요소가 윤리판단에 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판단의 의미는 단순히 그 인간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머무는 것 이상으로(그러한 평가는 법률적 평가로 족하다), 한 인간 실존에 대한 총체적 판단이다.

변호사는 상인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확고한 입장의 근거는 변호사에게 요청되는 강한 공공성과 윤리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으로서와 직능인으로서의 나의 윤리가 충돌할 때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공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명확히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한 인간 개체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대한 판단을 덧씌우고자 하는 시도나,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보편적 선악성을 따지고자 하는 시도는 판단의 대상을 혼동한 것이다.
 
주어진 법률에 근거하여 법정에서 이기고 지는, 벌을 받거나 받지 않는 세태를 목격해야 하는 나는 그 결과로써 내려진 사회적 평가에 대해 기술하게 된다. 그러한 결과를 선함과 악함의 결과로 판단하는 것은 편의주의적이다. 지성적 나태함이 만연해지는 사회에서는 어느 구성원이나 임의로 불행해질 가능성이 있게 된다. 법정은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과정이지, 어떤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아니다.

새벽 4시 아무 차량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나는 절대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다. 내가 윤리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빨간불이기 때문이어서다. 이런 행동 자체는 윤리적인가?


그렇지만 철학만은 그 낱말의 특성상,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그에 대한 사유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지점에서 좋아하는 것은, 법정에서 벌어진 여러 행위의 결과들이 어떻게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지를 판단하는 일과 법원의 판단 결과를 한 근거로 하여 법원이 내리지 않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오만하게도. 특수하고도 개별적 행위들과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을 모아 종합해 보면, 보편적으로 나의 윤리관이나 도덕관을 스스로 메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추출된 윤리적 요소들을 모아 놓으면, 인간의 윤리와 이기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됨과 동시에 생각에 부족한 점들을 알게 된다. 결국 나의 관심 대상은 사회가 아니라 원자 단위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대 윤리학자 센델의 정의에 관련된 책과 강연. 그의 윤리관의 대상이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지 개별 행위인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2. 너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에 대해 함께 말해야 한다. 그 선후 관계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칸트가 간접적으로 이견을 내고 있으나, 두 개념이 서로를 전제하지 않고는 진화될 수 없음은 일견 분명해 보인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에서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불멸의 사랑에 대한 담론을 펼쳐나가고 있는데,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 이야기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칸트는 이러한 사랑 담론의 계보에 더하여 사랑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 인간의 미추 판단이라는 능력을 통해 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다.


21세기까지 찬란하게 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서양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에 기반해 있다는 주장은 내 생활 세계의 가치관과 사랑관을 송두리째 바꾼 충돌적 울림이었다.

기숙사 1층 델리코 카페에서 격양에 찬 채로 단숨에 다 읽었던 김동규의 책. 멜랑콜리를 통해 서양 예술작품과 문화를 조망하는 그의 독특한 시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과거와 현재가 뒤범벅된 서양 예술문화의 모습 속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아름답고도 혐오스럽게 그려낸 영화였다. 그리고 한 가수는 내가 떠올렸던 그것과 비슷하고도 다른 시상을 파리 인 더 레인이라는 노래로 현명하게 풀어냈다.


 앎의 갈래를 크게 나누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과학의 대표적 탐구방법은 추론과 측정이다. 반면 인문사회과학의 대표적 탐구방법은 추론과 해석이다. 해석의 원리는 데이빗슨과 같은 이가 말했듯 사랑의 원리, 즉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기 위해 언어로서 간접적으로 전달받을 수밖에 없는 원초적 한계 안에서도  앎의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이다. 콰인이나 데카르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보는 그대로 네가 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인문사회과학을 더 튼튼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카페들. 낯선 곳이라도 카페를 방문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공상에 빠지는 시간을 사랑한다. 가끔 그 기억의 장면들이 한 점의 흑백사진 속 피사체처럼 불현듯 머릿속에 머무를 때가 있다. 그렇게 찾아오는 장면을 찬찬히 곱씹으며, 그때의 기억과 감정에 대해 음미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 없이는 앎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판단, 미추 판단이나 취미 판단도 불가능하다. 특히 아름다움 판단의 영역에서 사랑은 인간 실존의 한 축으로서 그 판단대상인 예술의 단초와 근원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특히 서양 문화에서의 수많은 예술작품과 문의 사상적 기반은 사랑 중에서도 특히 반쪽짜리 사랑, 자기 사랑, 자기애, 나르시시즘에 기반하여 있는 측면이 있다.


내 마음과 감수성을 더 섬세하게 사용하고자 할 때 찾았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술관과 예술마을. 현대 그림과 조각품, 미디어 아트들을 감상하며 고요한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싶었다. 아련함이 묻어있는 장소들.
처음으로 음악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정신적 공명과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음악 앨범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이런 음악을 우연히 감상하고 파고들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음악은 항상 그 음악을 들었던 그 시간과 장소의 내가 보고 느꼈던 그대로, 기억 속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준다.
가끔 공개된 무대 위에 오를때면, 음률을 연주하고 곡조를 부르는 내가 어떻게 비추어질지는 까맣게 잊게 된다.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가는 운동하는 공간. 무거운 무게를 들고 밀고 당기는 활동을 하며 몸이 흥분되면 자연히 정신과 사유의 방향이 새로워진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이방인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필록세니아)를 베풀었던 필레몬과 바우키스가 보였던 사랑의 원리를 들어 환대의 근간을 설명하려 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고양이는 나를 동일한 나로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가슴에 심긴 사랑의 씨앗이 뿌리내려 자라는 과정에서, 사랑의 열매가 내 쪽으로 과하게 향하지 않도록 늘 경계하여야 한다. 앎과 선함과 아름다움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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