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꿀꿀 Dec 11. 2022

28세에 교사를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떠난 이유

나는 뿌리를 내리고 싶어

나는 살면서 언제나 마음을 의지할 지반을 찾으며 살았다. 처음 마음을 온전히 의지했던 것은 으레 아이들이 그렇듯, 가족이었다. 화목했던 우리 가족.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줄 알고 온전히 몸과 마음을 기대고 있던 가족이라는 지반이, 고등학생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건 가족만이 전부였던 내게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마음을 기댈 만한 곳은 없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를 키워내야 했고, 하루종일 밖에 나가 고된 일을 했다. 우리를 길러내던 지친 엄마의 표정을 보며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마찬가지로 혼자가 된 아빠는 가끔 찾아와 얼마간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홀로 되돌아가는 아빠의 뒷모습은 그렇게도 쓸쓸해보일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속성으로 아픔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어른, 어른아이가 되었다.


추슬러지지 않는 마음을 부여잡고 이악물고 공부해 장학생으로 서울의 한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이 도저히 안맞아 학사경고를 맞는 등 얼마간의 방황은 있었지만 국가장학금을 받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까지 완주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서울에 혼자 올라온 뒤 나는 가족과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지면서 한명의 성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상처받은, 마음의지할 곳이 필요한 어른아이였다. 마음을 잠시 쉬어가고 의지하고 싶을때마다 나는 충동적으로 먹고, 취했고,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싸구려 옷을 사거나 정처없이 신촌길바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온갖 인스턴트같은 자극에 시선을 빼앗기는 동안은 마음이 홀로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극들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금 마음 놓을 곳이 없어졌다.


나는 그렇게 계속 부유하듯 살았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사회에서 보여주는 그럴듯한 안정적인 삶은 대기업, 공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가 교사가 되길 바라셨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고 나도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었다. 언니와 나는 차례로 임용시험에 합격해 공립교사가 되었다. 엄마는 나의 임용고사 합격소식을 들은 날, 더이상 바랄게 없다고, 해준것도 없는데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울며 기뻐하셨다. 이제 모든게 끝이 난 것같았다.


지금까지 배운대로라면 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럴듯한 루트대로 살아왔고 내 몫의 노동을 하며 의식주도 나름대로 잘 해결하는 그런 삶의 궤도에 들어섰고, 안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안정되었을진 몰라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매일매일이 불행했다. 10년뒤, 20년뒤에도 이렇게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느니 매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죽고싶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물속에서 숨을 참고 사는 것만 같았다. 잠시 물밖에 입만 내밀고 숨을 쉴수있는 순간들만 기다리며 버티는 인생. 이런게 삶이라면 나는 더이상 살아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직업이 문제인가 하여 더 돈을 많이 번다는 다른 직업을 준비해보고자 했지만 퇴근 후 자정까지 이어졌던 고된 수험공부는 3개월도 안되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보통 직업을 가지고 난 다음 순서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인듯 보였다. 모두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음 차례는 결혼이야. 이상적인 결혼은 보통 서른살 전후로 해야하니까 성실하고 착하고 너를 사랑해줄, 그럴듯한 조건의 남편감을 찾아봐. 35살이 다가오면 그땐 조금 늦으니 서둘러봐. 결혼하려면  준비해야 할 결혼자금은 n천만원정도이고, 결혼하고나면 아마 아내역할이나 며느리역할, 엄마역할도 생기게 될테니 잘 준비해보렴. ’


의구심이 들었다.

결혼하고나면 그땐 행복할 수 있을까? 가정이 생겼는데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저 사회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대로, 제시해준 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정말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었을까?


내가 살아온 길에 의심을 품었을때 나는 정말 많이 아파야 했다. 그간 피나는 발버둥으로 쌓은 성과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라 모두 나를 보기좋게 감싸기 위한 빈껍데기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매일 밤 울고 울고 울고 그렇게 끝없이 울다가 결국 지쳐 잠들며 매일매일을 견디던 어느 날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맨날 운다고 해도 나를 구제해줄 영웅은 없어. 나를 구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야.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이대로 죽을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수도 없었다. 그때 저 멀리 아스팔트 위의 가로수들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자동차들이 연기를 뿜으면서 하염없이 지나가는데 가로수들이 가만히 선채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가로수들은 어둠속에도 저렇게 진초록빛을 띄면서, 눈부시게 서있어. 나도 어쩌면 홀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서야하는 나무와 같은게 아닐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단지 내가 두발로 디딘 땅 위에 홀로 단단히 박혀있을수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나는 눈물을 닦았다. 어차피 죽을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했다. 저 가로수들처럼. 모든걸 포기하고 나만을 위해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사회의 시선도 기대도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나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자.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웃게 하는 일들을 찾아보자.


문득 떠올랐다. 자습시간이면 도서관에 숨어들어 세계여행기를 닥치는대로 읽으며 가슴뛰어하던 고등학생때의 나의 모습이.


몇달 후 나는 사직서를 내고 공립교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가진 모든 짐들을 처분하고 커다란 배낭 하나를 샀다.


나는 역설적이게도 뿌리를 내려야 함을 느낌과 동시에 가지고있던 모든걸 버리고 지금 선 땅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뿌리를 내릴 힘을 기르려면 오롯이 혼자, 그 누구도 의지할데 없는 땅 위에서 돌아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진정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단지 오늘 이 순간을 살아내고, 온전히 나 하나만 믿으며 지구 한바퀴를 혼자서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짐을 다 싸고 보니 배낭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내 한 몸 살아가는데 사실 그렇게 많은게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왜인지 모르게 홀가분함을 느낀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조금은 더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될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28살에 교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창업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