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임용고시까지 보고 들어간 공립유치원을 도대체 왜 그만뒀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백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아 내놓는 나의 대답은 언제나 싱거웠다.
-그냥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뒀어요.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내가 그만둔 이유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정업무가 힘들어서?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는 게 힘들어서? 육체적으로 고된 점이? 월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이 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치원교사의 처우가 나아져야 하는 것은 맞으나, 만족하며 잘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그냥 나에게 이 일이 안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해도, 나에게는 최악이던 사람이 남에게는 좋은 애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 또한 사랑하게 된다던데, 나에게 유치원교사가 좋은 직업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유치원교사를 하며 변해가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꼼꼼해야 하는 이 일이 세심한 사람에게는 쉬웠겠지만, 어릴 적부터 막무가내가 별명이던 내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불도저같이 추진해서 대범하단 이야기를 자주 듣는 대신,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 생활적인 일에는 무심해서 ‘여자 기안 84냐’는 얘기까지 듣는 나다. 그런 내가 아주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놓치지 않을 것을 요구받으며 받는 스트레스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유치원교사는 아이들의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며 체크해야 하는 것이 일이다. 아이들의 그날의 표정, 건강상태, 하다못해 친구와 있던 말다툼까지도 무심코 지나친다면 필연코 학부모님에게 걸려온 전화에 ‘우리 애한테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라는 볼멘소리를 듣게 되니까. 그것은 행정 업무에도 적용되어 꼼꼼하고 세심한 동료선생님들을 보며 자주 좌절하기도 했더랬다.
안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장점이었겠지만 겪어보니 내게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30년 후의 내 직업이 예측된다는 게 죽고 싶을 만큼 따분했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것들조차 나는 자주 억압이라고 느끼고는 했다. 도대체 이런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에 겸직금지, 정치활동 금지라니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자유의 침해라고 느껴졌다. sns 중 하나인 유튜브를 한다고 해도 청에 신고하라는 교육청의 공문과 요구를 볼 때마다 나는 이 울타리가 안정을 넘어서 숨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에 자주 숨이 막혀왔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무의미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든 생각은 , 하루하루를 싫어하며 살기에 삶은 너무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인생을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한옆에 놓여 있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안전한 파도풀로부터 벗어나 깊은 바다로 뛰어내렸다. 20대 극후반의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내 손으로 부수고 나와버렸으니, 그만큼 불안감도 크지만 나는 오히려 안 그만뒀으면 어쩔뻔했나 싶다. 어제는 언니에게 죽어가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요즘 꿈꿔오던 세계여행과 문예창작 전공 석사를 계획하며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느낀다. 위험이 도사리는 깊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마음껏 다리를 펼칠 수 있어 좋다.
만일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온다면 그땐 마음껏 후회할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최선을 다해 땅을 치면서 열심히 후회하고 또 미련 없이 다시 일어나 갈 길을 가겠지. 나는 찾아오는 감정들을 마음껏 누리고, 안 맞는 옷은 벗어던지고, 답답한 울타리는 부수어버리며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뻗고 깊은 바다를 헤엄치며, 인생을 힘껏 끌어안고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