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직 / 필립스 보풀 제거기
"이거 나만 질렀어?" 그렇습니다. 직장인은 종종 접신을 합니다. 바로 지름신을 영접하는 것인데요. 지름신을 영접하게 되면 언제나 지름 지름 앓습니다. 신병은 신내림을 받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름병은 불치병입니다. '쇼핑'이라는 미봉책이 있기는 합니다. 지름 지름 앓다가 지르면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됩니다. 하지만 다시 또 다른 무언가를 지르고 싶어 지죠. 병입니다. 정 안 되면 참새가 방앗간 찾듯 다이소라도 찾아들어가 1천 원짜리를 흩날리며 부자가 된 기분으로 나오는 게 직장인의 섭리. 잼 중의 잼은 탕진잼 아닙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지름 지름 앓는 직장인이 쓰는 지름 투병기를 빙자한 쇼핑 제품 리뷰입니다.
이것은 필립스 보풀 제거기다. 아마도 제일 많이 팔리는 제품일 것이다. 보풀 제거기계의 김연아 정도 되지 않을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최상단에 나오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광고를 먹인 거라면 할 말은 없다.
원래 다이소에서 구입한 비슷한 제품을 잘 썼는데 올해 운명하는 바람에 새로운 보풀 제거기가 필요해졌다. 원래도 필립스 보풀 제거기를 사려다 다이소에서 똑같은 모양의 제품을 팔기에 호기심에 질렀었는데 꽤 쓸만했다. 그러니 원조는 더 괜찮겠지. 다이소 보풀 제거기야 5000원 주고 샀는데 2년간 애썼어 이제 편히 쉬렴. 얘는 그 두배가 넘는 1만 2000원 선.
덮개 없이 함부로 보풀을 제거했다가는 얇은 카디건에게 큰 구멍이 생길 것이야...! 하지만 얇은 카디건 아닌 두툼한 니트류에 작업할 때에는 덮개가 없는 편이 작업하기 수월하다.
AA 배터리 두 개가 들어간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이소 보풀 제거기는 저 배터리 넣는 공간이 보풀이 담기는 안쪽(반대쪽)에 있었다. 배터리를 갈기 위해서는 보풀을 헤치고 뚜껑을 열어야 했던 셈. 대체 제조사는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던 거지. 보풀 찌꺼기를 자주 제거하게 해서 기기의 청결함을 유지하려는 술책이었나.
오늘의 모르모트. 운동용 양말. 선택받은 이유는 빨랫대에 넣어놓고 아직 걷지 않은 상태인 빨랫감 중 제일 보풀이 심했기 때문이다. 찍고 나서 보니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옷으로 고를걸 그랬나 싶지만 이미 늦었어.
이렇게 대고 전원을 켜주면 지이잉~ 위이잉~ 하면서 안쪽에서 칼날이 돌아가며 보풀을 제거한다. 보풀을 제거해 넌 행복해지고 보풀을 제거해 넌 건강해지고(후략). 이 양말은 스포츠용이라 두꺼워서 괜찮지만 얇은 카디건은 보풀 제거기로 험히 다루다 주요 부위에 구멍 내는 사례를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에서 종종 보았다. 그리고 이걸 아까도 썼는데 또 강조하는 이유는 나도 한 번 그랬기 때문. 마음껏 대고 이리저리 상하좌우 비빌 수 있는 건 두툼한 니트나 코트 한정이다. 처음 산다면 좀 두툼한 천에 테스트를 꼭 해보길. 엣지 있게 구멍 내서 힙하게 입을 거라면 뭐 상관없지만.
오 생각보다 더 깔끔해져서 드라마틱한 비포 앤 애프터가 완성되었다. 보풀 제거하는 내내 별로 사진으로 티가 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놈 쓸만하구나. 이 정도면 성형하러 가고 싶어 지게 만드는 성형외과 광고에 견줄만한 비포 앤 애프터.
소음은 생각보다 크지 않지만 예민한 이웃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밤중에는 작업하지 않는 것이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제거된 보풀은 저렇게 통에 모인다. 나는 귀찮으니 또 통이 꽉 채워질 때까지 비우지 않고 하이에나처럼 다른 보풀 일어난 옷을 찾아 헤매겠지. 생각 비우고 싶을 때 작업하면 특히 좋다. 지이잉~ 지이잉~ 하는 가운데 이 공간에는 나와 보풀 제거기와 보풀과 옷만 남는다. 십자수나 코바늘 뜨기 못지않게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6벌을 한꺼번에 쉬지 않고 작업했는데 득도하는 기분이었다. 보풀을 다 제거한 옷을 마주하면 블랙헤드를 몽땅 제거하고 맨들 맨들 해진 콧등을 만졌을 때와 유사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죽어가던 옷에 심폐소생을 해서 한 계절 더 입을 수 있어 마치 나를 굉장히 알뜰한 주부 9단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다. 이따 또 스트레스받으면 한바탕 보풀 제거 타임을 가져야겠다.
글&사진 조랭이 / 지름 지름 앓는 직장인(일명 지지직) 운영자이자 보기 좋은 회사가 다니기도 힘들다의 주인공. 이 시대 직장인답게 언제나 지름 지름 앓고 있다. 오래 앓다가 한 순간에 훅 지르고 한동안 써본다. 10분 동안 사진 찍고 20분 동안 글 써서 3분 안에 소화되는 리뷰를 지향하고 있다. kooo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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