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싶은 배틀

절대로 지고 싶은 배틀이 시작된 것이다

by 쿠컴퍼니

서로 접점이 없어 보이는 비슷한 연령대의 세 남녀가 카페에 모였다. 누가 먼저 입을 열 것인가. 어색하게 아이스커피만 쪽쪽 빨아대는 가운데 얼음끼리 녹아 달그락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A다. “요즘 파일 압축 풀어주고 월급 받아.” B와 C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A의 직업은 컴퓨터 기사다. 사내 컴퓨터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으면 출동해서 작업하고, 인쇄가 되지 않을 때 노트북과 프린터를 연결해 주는 게 주 업무다. 모니터 화면이 나오지 않으면 선을 연결해 주고 종종 휴대전화 파일을 컴퓨터로 옮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서버가 열리지 않아도 출동한다. 물론 모두 거짓이다. 사실 A의 업무는 디지털 전략 수립이다. 그러나 신의 장난일까. 디지털 전략 수립을 해야 하는 A의 상사는 아날로그의 현신 같은 인물이니 말이다.

듣고 있던 B가 씩 웃으며 말한다. “저희 선배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과 익스플로러 주소창을 구분 못 하세요.” 잠시간의 침묵. A가 허탈한 듯 웃는다. C가 재차 한숨을 쉰다. C 앞에 놓인 잔에는 벌써 커피가 반이나 줄었다. 목이 탄다. A도 재차 커피를 마신다. 배틀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더 최악의 상황인지 겨루는, 절대로 지고 싶은 배틀.

모두가 안다. 여기서 이겨 봤자 상처뿐이라는 걸. 하지만 누가 최악인지 자웅을 가려볼 필요는 있다고 셋은 생각한다. A가 다시 말을 잇는다. “우리 선배는 파일 여러 개를 메일로 한 번에 못 보내.” 동그란 눈의 C가 처음으로 입술을 뗀다. “포털 사이트 대용량 메일 쓰면 되잖아요.” A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포털 사이트 메일이 없으시대.” C의 동그란 눈이 더 커진다. “엥, 한국 사람인데?” 생각에 잠겨 있던 B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한다. “선배, 나 다음 내용 알 것 같아요.” A가 다시 커피를 들이켠다.


B의 예측대로였다. A의 상사는 그에게 포털 사이트 이메일이 없다고 했다. A는 문득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친동생에게 수학 과외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A가 다시 물었다. “포털 사이트 로그인되세요?” A의 상사는 그에게 포털 사이트 아이디가 있다고 했다. A는 다시 추억에 잠긴다. 눈앞에 노란 표지의 ‘수학의 정석’ 기본 편이 놓여있다. 동생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앞에 나온 예제를 풀어 보라고 하는데 연신 문제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샤프를 달각대며 왼손으로는 이리저리 흩어진 지우개 가루를 조물딱 댄다. 다시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해 보지만 이미 열띤 상태는 가라앉지를 않는다. 충동적으로 정석 모서리로 머리를 쥐어박을 뻔했지만 겨우겨우 참아내고 어머니에게 말한다. “동생 과외는 못 하겠다”라고. 다시 현실. A는 얼굴에 ‘화났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선배, 포털 사이트 아이디가 있는 거면 포털 사이트 이메일이 있다는 뜻이에요.” 무심결에 C가 “미친…”이라고 말했다. A는 그 뒤에도 대용량 이메일 보내는 법을 전수하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C는 A와 B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얘기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PPT에서 그림 못 바꾸겠다고 늘 저를 부르시던 D 선배가.” D는 A도 아는 사람이다. 컴퓨터에서 사진 하나를 열 때도 더블클릭해서 열고 다시 X자를 눌러 끄고, 다음 사진을 더블클릭하기를 스무 번을 반복하던 D. 한글 파일을 열어 전체 선택을 할 때 첫 줄에서 커서를 클릭한 채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다 놓쳐서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커서를 클릭하고 아래로 드래그하기를 반복하던 D. A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이고, 이렇게 살아도 회사를 잘 다닐 수 있으며 승진도 할 수 있다는 것, 기다림의 미학, 스님들의 몸에서 사리는 어떻게 나오는지 알려준 해골 물 같은 존재.


한시적 백수로 살던 C는 다음 주에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다. C가 새롭게 맡은 업무는 디지털 콘텐츠 제작. 그렇다. 여기 모인 남녀의 유일한 공통점은 업무에 ‘디지털’이라는 하품 나오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A와 B는 회사만 다를 뿐 업무가 같다.) C가 “다음 직장은 얼마나 빨리 그만두고 싶어 질지 궁금하다”라고 말하자 A가 “일주일?”이라고 말하고, B가 “3일?”이라고 말한다. C가 “친구가 출근 첫날 아침에 눈 뜨는 순간 후회할 거라던데요”라고 말하자 모두가 공감한다. 빈 커피잔을 빨대로 괴롭히던 C가 말한다. “가서도 선배 말처럼 답답한 사람들이랑 일하게 되면 어쩌죠.”

“그래도 압축은 풀 줄 알 거 아냐.” / “그래도 해시태그가 뭔 지는 알 거 아냐.”

A와 B가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C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C는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최악은 아니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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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션 [faction] / 역사적 사실(fact)과 가공의 이야기(fiction)를 더한 문화예술 장르로 이 글도 여기에 해당된다. 정말이다. 설마 이런 일이 진짜로 있을라고. 하하.




보기 좋은 회사가 다니기도 힘들다. / JOB : what looks good also wears you out good.

보기 좋은 떡은 먹기 좋을지 몰라도 보기 좋은 회사는 다니기 힘듭니다. 하물며 보기 안 좋은 회사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런 회사 다니는 흔한 일개미 조랭이의 직장생활 이야기입니다. kooo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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