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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컴퍼니 Dec 26. 2016

완벽한,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

오랜만에 겪는 옛날식 꼰대의 참맛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가까운 과거로 가면 얼마나 불편할까?"

tvN에서 했던 예능 프로그램 중에 조선시대의 삶을 체험해 보던 '렛츠고 시간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개그맨 조세호, 유상무, 장동민부터 이종격투기 선수 김동현까지 여러 스타들이 출연해 과거의 삶을 그대로 체험해 보고 삽질하는 과정을 통해 고생하는 모습으로 시청자에게 웃음을 주겠다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특유의 웃음을 주는 방식 때문에 가학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 시간탐험대가 되어 가까운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상황을 회식자리에서 맞이하고 그 잊지 못할 특별한 소회를 글로 남겨둘까 한다.


그날은 성탄절을 이틀 앞둔 크리스마스이브 전야 불금이었다. 어느 날이든 부서 송년회를 하기에 좋은 날이 있겠느냐마는 특히나 부서 송년회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날임에 틀림없는 날짜 선정이었다. 가뜩이나 집에 아무도 없어 심심하다며 주말에 1박 2일 송년회를 하자던 선배를 끊임없이 만류해 겨우 만들어낸 날짜였기에 다들 감지덕지하며 군말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송년회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크래프트 비어와 함께 하는 1차는 비교적 무난하게 지나갔다. 캐주얼한 식당을 예약한 선배에게 마음속으로 치얼스를 외쳤다. 하지만 윗분들은 소맥을 말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예상대로 소주와 맥주가 흐르는 2차 장소로 넘어갔다. 이날 술자리가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부장과 차장 빼면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화장실에서 “X발 졸라 안 끝나네"라는 프리랜서의 일갈을 들었기 때문. 문 밖에서 그걸 들었을 때 난 실수로 내가 입 밖으로 뱉은 말인 줄 알았다.


파도타기가 계속되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흥이 오른 부장은 나에게 편의점에서 현금으로 20만 원을 뽑아오라고 했다. 싸했다. 아마 눈치 빠른 직장인이라면 어디에 쓰일 돈인지 예상할 수 있었으리라. 나도 다년간의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쉽지 않겠구나. 근처 편의점에서 20만 원을 뽑았다. 수수료 1200원이 나왔다. 진짜 잠깐 고민했다. 대의를 위해 돈이 안 뽑힌다고 해야 할지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일개 일개미. 그렇게 뽑아온 돈을 드리자 부장은 껄껄대며 각자의 손에 2만 원씩을 쥐어줬다. 모두가 약간 떨떠름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돈을 받았다. 부장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이 돈은 너네 택시비다. 지금 돈을 받은 사람들은 다 같이 노래방에 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최소 한 시간 안에는 자리를 뜰 수 없다."


아, 이거 안다. 옛날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햇병아리 인턴 시절 내지는 신입사원 시절 퇴근하고 집에 가면 할 일 없고 친구도 취미도 없는 인간들이 미친 듯이 심심한데 혼술 혼밥 혼자 노래할 용기는 없으니 탬버린 쳐주고 박수 쳐줄 사람이 필요해서 아랫사람들을 잔뜩 동원하던 과거의 악습. 이제는 고려장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진 바로 그 악습이었다. 나는 수년 전으로 워프해 있었다. 마치 시간탐험대처럼.


갑자기 수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로 가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여러 부서를 거쳤지만 심지어 신입사원일 때조차 2차도 아닌 3차를 가는데 '무조건' 이라는 '단서'가 붙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일부 회사에서는 첫차까지 달리는 게 관행처럼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건 그 회사고 이건 이 회사. 그리고 그건 정말 미친 회사다.) 2차도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 가라고 하는 분위기에서 3차를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말했다. "저는 내일 오전에 일정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정을 넘긴 시각. 필름은 안 끊겼지만 지하철은 끊겼다. 이번에는 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내일 일은 내일 일이고 지금은 노래방에 가야 한다고 했다. 취한 사람 앉혀놓고는 뭔 소리를 해도 먹힐 리 없다. 맨 정신일 때에도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 오죽하랴. 이렇게 가다가는 주말 전체를 망치겠구나 싶어 아래층에 내려와 열을 식히는데 다른 선배가 1층으로 내려오더니 "노래방 안 가고 잠깐 커피 마시고 파한대. 가자"고 말했다. 그나마 커피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맞은편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이미 시곗바늘은 12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차장이 씩씩대며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노래방에 지금 자기랑 부장 둘만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당황했다. “아까 커피숍 갔다가 집에 가기로 하셨잖아요.” 다른 선배의 말이었다. 차장의 한 마디는 참으로 설득력이 있어서 아무도 대꾸할 수 없었다. “부장이 가자는데 어떡하라고?" 그다음 말도 압권이었다. "여기 커피 테이크 아웃할 사람 두 명만 남고 다 일어나.”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장은 열에 받쳐서 큰 소리를 냈다. 그 역시도 술이 좀 된 상태였다. 씩씩대던 그는 이윽고 “맞은편으로 당장 와. 지금 빨리”라는 말과 함께 지하 1층 노래방으로 사라졌다. 선배들은 “저렇게 열 냈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서 참 차장도 면이 안 서겠다”라며 커피 나오면 노래방에 가서 얼굴만 잠깐 비추자고 했다.


모두가 더러운 기분으로 노래방 앞에 도착했는데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부장과 차장이 신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현란한 조명 아래에서 무아지경인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회생활은 정말 더럽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갓 데뷔한 아이돌 가수의 무대도 저렇게 열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참다 참다 폭발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서 이걸 해야 하지? 이 곡이 끝나면 들어가서 얼굴만 비추고 가자는 선배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 표정을 살핀 선배가 "어차피 취해서 다들 기억 못 할 것 같으니 집으로 가라"라고 말했다. 다른 선배는 "노래 한 곡만 끝나고 얼굴 비추고 가라. 여기까지 기왕 왔으니"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규정한 올바른 사회생활, 꼰대들의 구미에 맞는 리액션이 후자라는 것은 나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말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불행 중 다행히 택시는 빠르게 잡혔다. 이날의 유일한 행운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와중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말이 지나 한 소리 들을 것보다도 지금만큼은 내 기분이 더 중요했다. 이 이상의 더럽혀짐은 사절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선배 중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마음 상하고 간게 신경 쓰였다며 위로차 걸어온 전화였다. 그리고는 여기 술 취해서 다들 기억 못 할 거다, 회사에서 상처받지 않으려면 조금 더 둥글어질 필요도 있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부모님처럼 다독이는 말에 참았던 눈물이 다시 나왔다. 한동안 퉁퉁 부은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추스르고 잠을 청하려던 차에 휴대전화로 한 통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Web발신][체크.승인]

12월 24일 오전 2시 45분

OO노래방

9만 2000원


정말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아닌가. <끝>



* 팩션 [faction] / 역사적 사실(fact)과 가공의 이야기(fiction)를 더한 문화예술 장르로 이 글도 여기에 해당된다. 정말이다. 설마 이런 일이 진짜로 있을라고. 하하.




보기 좋은 회사가 다니기도 힘들다. / JOB : what looks good also wears you out good.

보기 좋은 떡은 먹기 좋을지 몰라도 보기 좋은 회사는 다니기 힘듭니다. 하물며 보기 안 좋은 회사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런 회사 다니는 흔한 일개미 조랭이의 직장생활 이야기입니다. kooo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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