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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컴퍼니 Jan 03. 2017

그 선배의 손수건

내가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조만간 사표를 쓸 생각입니다."

...라는 말을 사내 인사에게 내뱉는 것처럼 부질없고 위험한 행위는 또 없을 것이다. 일단 비밀이 지켜질 거라는 보장이 없고, 저 말을 뱉은 순간부터 내 모든 행동이 '조만간 사표를 쓸 사람'의 것으로 재단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일에 소홀한다 싶으면 "쟤 사표 쓰려고 저러는구나"가 되어 버리고, 불합리한 일에 분노해도 "쟤 사표 쓰려고 저러는구나"가 되어버린다. 본디 회사 생활하며 결혼한다는 소식과 퇴사한다는 소식은 최후의 최후에나 밝히는 것이 정석이라고 배워온 차에 우리 부서에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A 선배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은 이 선배는 괜찮겠지...라는 어리석고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몸담 부서는 정신적으로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반년 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부서에  A 선배. 대체 어쩌다 여기로 온 걸까. 그가 우리 부서의 일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중요지 부장단 앞에서 PPT를 선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눈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 그 정도로 중요하면 네가 직접 해봐."  말과 함께 A 선배는 우리 부서로 왔다. 과한 열정이 커리어를 이렇게도 틀어놓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렇게 온 선배는 열정적이었다. 후배인 나보다도 더욱. 분명 이 부서에 처음 왔을 때 나도 저랬다. 하지만 그런 나를 시들게 한 것 또한 여기가 아닌가. 타인의 열정이 타오르다 못해 한 줌 재가 되는 것을 실험 관찰하듯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는 건 분명 유쾌한 취미는 아니었다. 결국 몹쓸 오지랖이 발동하고야 말았다.


나는 이 부서 유일한 후였지만  선배는 내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선배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많이 도와달라"라고 하던 식사 자리에서 주제넘게이 부서에서 하면 안되는 것과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읊어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고통받아왔는지도 강조했다. 선배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이해심을 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요." 아, 생경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사내 인사로부터 듣는 따뜻한 말. 이 부서에서 뺑이치는 동안 그 누가 내게 고생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던가. 후식을 사겠다고 하자 선배는 "후배한테 뭐 얻어먹는 거 아니다"라며 한사코 거절하더니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쥐어줬다. 그날 이후 선배는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아이고, 저런..."이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커피 한 잔 할 래요?' 그렇게 함께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면 남은 하루버텨낼 힘이 생겨다. 사무실 하나의 버팀목이 생겨난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선배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올해 안에 사표를 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회의 때 불합리한 지점이 있으면 나보다 먼저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곤 했다. 백마고지 전투 중에 지원병력을 맞이하는 기분이 이랬을까. 내가 했을 때 먹히지 않던 말은 선배의 입을 통해 조금씩 먹히기 시작했다. 선배가 온 뒤로 꼬여있던 내 삶이 조금씩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때때로 선배는 주니어 시절을 회상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줬다. 단순히 "참아라", 아니면 "사는 게 다 그렇다" "이게 회사다" 같은 공허한 말 대신 참다 참다 정 불합리하다고 느끼면 들이받으라고, 자신도 젊은 시절 그렇게 해서 많이 불려 갔었다고 웃으면서 말해주는 선배였다.



함께 버텨낸 반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태생부터 잘못된 팀이었고 상황은 악화됐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바꿔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여태껏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사람이 1년 넘게 운영해온 식당에서 나는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웨이터였고 선배는 뭐랄까, 매니저급 정도 되었으려나. 울며 겨자먹기로 1년을 겨우겨우 채우고 피폐해진 심신으로 부서를 옮겨달라고 말했다. 냉정한 답이 돌아왔다. 지금 여기서 서빙할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옮겨줄 수 없다는 것. 수년 동안 다니며 한 번도 공식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던 말을 꺼냈다. 선배들이 늘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입밖으로는 꺼내지 말라던 말이었다. 부서를 옮겨주지 않으면 사표를 쓰겠다, 는 말.


돌이켜 보면 나는 처음 사원증을 받아 들고 여기가 평생직장이 되리라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꼼꼼히 신중하게 고르고, 치열하게 준비해서 입사한 곳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나와 평생 함께 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짝사랑은 짝사랑일 뿐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사표를 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오래 다닌 직장에 이별을 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두운 내 표정을 읽은 선배는 그날도 커피를 마시러 잠깐 내려가자고 했다. 여느 날처럼 자신은 프리퀀시를 잘 모으지 않는다며 내 앞으로 프리퀀시를 두 잔 적립해줬다. "선배 덕에 다이어리 또 하나 생기겠네요..."라고 말하며 애써 웃었다. 그리고 그만두기 전 이 선배에게는 꼭 미리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사표를 쓸 생각입니다."


선배는 또다시 "아이고 저런..."이라고 말했다. 데자뷔. 선배는 내 덕에 처음 겪는 부서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내가 나가면 자신이 많이 힘들어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관두는 건 아니지 않으냐. 나갈 거면 무능한 사람들이 나가야지 않겠느냐"라며 나를 다독였다. 눈물은 다독여주는 사람이 있으면 보란 듯이 흐르는 법이다. 마지막까지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에게 깍듯하게 존대하는,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풀어놓으면 후련해 질거라는 말에 그간 있었던 일토해냈다. 이런저런 상념이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고 고개를 젖혔다. 선배가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베이지색에 검은 색 체크무늬가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이거, 오늘 아직 안 쓴 거예요."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끝>




* 팩션 [faction] / 역사적 사실(fact)과 가공의 이야기(fiction)를 더한 문화예술 장르로 이 글도 여기에 해당된다. 정말이다. 설마 이런 일이 진짜로 있을라고. 하하.




보기 좋은 회사가 다니기도 힘들다. / JOB : what looks good also wears you out good.

보기 좋은 떡은 먹기 좋을지 몰라도 보기 좋은 회사는 다니기 힘듭니다. 하물며 보기 안 좋은 회사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런 회사 다니는 흔한 일개미 조랭이의 직장생활 이야기입니다. kooo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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