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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 이제는 어른이 될 때

by 몽땅별

최근 ‘영포티’ 밈이 빠르게 확산됐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시작된 이 현상은 언론 보도를 거쳐 학술 분석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정작 영포티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커뮤니티와 댓글란에서 해명에 나서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해명 시도는 그들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영포티는 2015년 등장한 용어로, 원래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젊은 취향을 즐기는 40대를 가리키는 긍정적 표현이었다. 다만 최근 젊은 세대에서 의미가 변질됐다. 이들에게 영포티는 ‘젊어 보이려 애쓰는 꼰대’ 혹은 ‘자신이 젊다고 착각하는 중년’을 뜻하는 부정적 용어를 뜻한다. 여기에 파생돼, ‘스윗’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스윗영포티’는 본인의 연령을 의식하지 못한 채 젊은 여성에게 부적절한 관심을 보이는 40대 남성을 조롱하는 단어를 의미한다.

영포티 밈이 확산되는 가운데, 정작 40대 당사자들은 그 확산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젊게 행동하는 게 왜 문제냐”라며 단순히 패션이나 취향을 지적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경제력 없는 MZ세대의 질투” 또는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로 치부하며 방어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영포티 밈이 40대를 일정 부분 풍자하거나, 세대 갈등의 맥락을 포함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영포티’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닌, 40대의 모순을 꼬집는 헤게모니적 단어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역설적이다. ‘영포티’도 마찬가지다. ’포티(40대)’는 본질적으로 ‘영(young)’할 수 없다. 영포티라는 단어에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문화적·사회적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차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내포하는 좌절된 권력의지가 드러나 있다.

나이 먹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퇴한다는 의미다. 이를 부정하면 열등감이 드러난다.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무대 중앙에 설 수 없다는 진실이 두려워 겉모습을 꾸미고 젊은 세대를 트집 잡으며 괴롭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종종 박탈감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 내가 세상에서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자각할 때 무력감을 느낀다. 미숙한 사람은 이때 남을 질투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이 현실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를 보이며, 타인을 배려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젊음은 특권이자 의무다. 젊은이들은 그 특권을 누리지만, 미래 앞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과 무한한 가능성 앞의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영포티가 아무리 젊음을 되찾으려 애써도, 이 불안과 두려움을 다시 짊어질 수는 없다. 젊은이가 영포티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는 권리만 누리려고 하고, 의무는 회피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이제 영포티는 젊어지려 애쓰는 것이 아닌, 불안과 두려움의 늪을 헤엄하는 젊은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해주는 어른이 되면 어떨까. 해변에서 아이들이 수영할 때, 그들을 보며 차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기는 어른처럼 말이다. 젊은 세대는 이런 어른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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