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국내 영화들을 압도했다. 12월 6일 기준 올해 국내 박스오피스 1위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566만 명)이다. 이날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도 338만 명을 돌파하며 5위에 올랐다.
코로나19 시대를 제외하면 201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줄곧 1000만을 넘겼다. 2012년 '도둑들'(1293만 명)을 시작으로 2013년 '7번방의 선물'(1281만 명), 2018년 '신과함께2'(1274만 명) 등 한국인들은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2014년 '명량'은 1761만 명을 달성하며 한국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올해 한국 영화 중 가장 흥행한 '좀비딸'은 563만 명에 그쳤다. 명량 대비 31%에 불과한 성적이다.
CGV와 충무로, 안이함이 부른 추락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고, 구조도 영원할 수 없다.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는 코로나19 시기 '집에서 보는 영화'라는 구호를 선점해 언택트(비대면 접촉) 문화의 중심축이 됐다. 다만 멀티플렉스(복합문화공간)의 기치를 걸었던 CGV와 충무로는 추락하고 있었다.
CGV는 한국 영화계의 패러다임을 선도했던 기업이었다. 1995년 제일제당 이재현 회장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만남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1998년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CGV강변11이 문을 열며 충무로는 급성장했다.
2000년대는 명품 영화들이 즐비했다. '쉬리'(1999년)는 타이타닉을 꺾는 대흥행을 기록했고, 2001년 '친구'는 800만명을 끌어모았다. 2003년은 충무로의 전성기였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등 걸작들이 쏟아졌고, 그해 12월 '실미도'가 사상 최초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2006년 '타짜'와 2008년 '추격자' 등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영화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았다.
그러나 2010년대 충무로는 창작적 매너리즘에 빠졌다. 2009년 해운대가 다시 천만 관객을 돌파했으나, 실상은 수준 낮은 한국 블록버스터였다. 2012년 '도둑들'도 천만 명을 찍었다. 다만 양산형 상업 영화라는 평이었다. 이 작품들의 성공은 충무로를 안이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주도의 멀티플렉스 배급 구조가 고착화됐다. 특히 '명량'은 그 수혜를 톡톡히 보며 1700만 명을 돌파했지만, 과연 그 영화가 그만한 퀄리티인지는 의문이다.
연이은 성공은 '신파', '스타 마케팅', '질낮은 교훈'을 잘 버무려 영화를 만들고, 독점 구조로 배급만 하면 관객들이 무조건 볼 것이라는 공식을 마련했다. 안이해진 그들은 코로나19 이후 등장한 OTT라는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했다.
의아한 건 이들이 향후 컨텐츠가 OTT 중심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흐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CJ는 넷플릭스의 위상을 높인 '킹덤'을 제작했으며, 영화 평론가들은 뻔한 신파 대신 다양성과 작품성을 추구하라는 조언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성공 공식에만 의존했다. 공식이 정답은 아닌데도.
결국 추락하고 있다. CGV는 MBK와 미래에셋증권 등 재무적투자자(FI)의 동반매도청구권(드래그얼롱) 행사 요청에도 매도청구권(콜옵션) 행사를 하지 못하며 아시아 시장을 포기할 가능성이 커졌고, 충무로 영화판은 또 좀비딸을 양성하며 기존 공식과 큰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코로나19는 시대를 바꿨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으면 도태되는 법이다. OTT와 숏폼이 2020년대의 핵심축임에도 여전히 멀티플렉스라는 30년 전의 정체성에 사로잡혀 CGV는 침몰하고 있고, 충무로는 양산작만 찍어내고 있다.
서브컬처의 부상
이젠 서브컬쳐가 주류가 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네 다음 씹덕'이라는 조롱을 듣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박스오피스 1위을 차지했고, 2023년 이후 후지이 카제, 이마세, 아이묭 등 일본 아티스트의 노래가 한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J-POP은 올해 한국에서 해외 음원 비중의 10.7%를 차지했다.
등장 배경은 뉴미디어였다. 틱톡과 숏폼에서 제이팝이 배경곡으로 쓰이며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이다. ‘물품보관소’로 대변되는 AGF(애니메이션X게임페스티벌) 행사도 마찬가지다. 물품보관소 영상이 유튜브, 틱톡 등지에서 퍼졌고, 진정한 서브컬처 매니아층이 모이는 공간으로 인식됐다. 여기에 게임사도 편승했다. 최근 다수 게임사는 기존 게임 박람회 '지스타' 대신 AGF를 택했다. 지스타는 이젠 인터넷 방송인들만 방문하는 공간으로 변했고, 매니아 등은 볼거리가 더 많은 AGF를 방문하고 있다. AGF가 활황을 빚을 동안 지스타는 저물어가는 중이다.
진정성의 회복
결국 이 모든 것에는 팬들의 '진심', 작품의 '진정성'이 담겨있다. 조악한 공식을 들이대며 관객들을 끌어모으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객들은 안다. 그 작품들은 진정성이 묻어있지 않다고. 진정성이 없는 작품은 과감히 버려진다. 팬들의 진정성은 문화의 기저다.
사전적 용어로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에 대비되는 소수 집단의 문화를 의미한다. 다만 단어 그대로에 따르면, 서브컬처는 '하위문화'라는 뜻이다. 문화 밑에 있는 문화, 즉 하부구조로서 작동하는 문화가 바로 서브컬처(Sub-Culture)다.
주류 문화는 수많은 다수의 취향이 밑바탕으로 축적돼 솟구쳐 최종 형성된다. 반면 하부 문화는 범주화할 수 없다. 특정 소수 집단들이 독특한 가치와 양식을 나누며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고, 그 연대가 본격화할 때, 그리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 특성을 구조화할 때 서브컬처는 '컬처'가 된다.
서브컬처를 연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류 문화에 편승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진심으로 좋아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한 순간, 그들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공간이 커지고 본격화되면, 그것은 더 이상 소수의 취향(서브컬처)이 아닌 하나의 문화가 된다. 즉 진정성이 서브컬처의 근원이며, 동시에 주류 문화로 성장하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진정성이 없이 공식과 마케팅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문화가 될 수 없다.
이는 CGV와 충무로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K-컬처 전반이 과포화 상태다. 특히 K-POP은 우수한 인력이 동원되지만, 그 안에 진정성은 빠져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아이돌 그룹, 계산된 콘셉트, 정해진 공식. 이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K-POP의 획일성에 대한 반발력으로 J-POP이 반사이익을 누린 것처럼, K-컬처 전체도 공식과 마케팅으로만 작동하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CGV와 충무로가 그랬듯이. 매너리즘에 빠진 채 기계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구조는 결국 팬들의 외면을 받는다.
공식이 아닌 진정성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작품을 향한 진심, 팬을 향한 진심이 없다면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상품일 뿐이다. 그리고 영혼 없는 상품은 결국 시장에서 도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