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위선 비판에 대한 비판(2)

위선은 과연 나쁜가

by 몽땅별

앞서 니체의 르상티망을 통해 기독교적 위선을 분석했다. 그렇다면 위선은 과연 나쁜 것일까. 한국같이 유교적 문화가 남아있는 사회에서 위선은 위악보다 용서받지 못하는 가치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위선은 맹목적으로 타도해야 할 절대악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철학자 주디스 슈클라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내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행동 사이에 늘 간극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어느 정도의 가면(페르소나) 없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간극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에 누군가를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게으른 비판이다.


위선은 역설적으로 도덕적 증거다. 도덕적 기준이 없다면 위선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이 종교 윤리라는 높고 이상적인 도덕 기준을 공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는 니체가 지적한 특정 종교의 도덕적 결함(노예도덕)이기보다, 보편적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선을 종교적 형태로 발현한 것일 수 있다.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서 인간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겉으로나마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 동기가 순수하지 않아도 선한 가치를 표방하는 행동은 사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여한다는 게 칸트의 입장이다.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기독교적 위선은 적어도 그들이 좇으려는 선 자체가 사회적으로 유효함을 보여준다.


니체의 맹렬한 기독교 비판도 예외가 아니다.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결별한 니체의 일생을 고려하면, 그의 비판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르상티망일 수 있다. 누군가를 위선자라고 공격하는 행위 자체가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또 다른 위선을 내포한다. 비판자 역시 자신의 비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위선을 벗어나기 위해 위악을 택한다면 그것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위선을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과잉이다. 기독교적 위선은 높은 도덕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몸부림에 가깝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자신의 한계(위선)를 성찰하지 않고, 비기독교인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신자들의 시혜적 태도는 그들 스스로 위선이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이상적 교리와 현실적 본능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 없이 도덕적 고결함만을 주장하는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다. 기독교적 위선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종교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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