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지난 20대를 이르집어 보면 내 삶은 인내의 반복이었다. 나는 그 무거운 인내를 품위라는 거창함으로 포장했다. 실상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순 겁쟁이에 불과했음에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있는나날>은 이러한 우물쭈물함의 처연함을 잘 묘사한다. 주인공 스티븐스 집사는 스스로 정립한 품위를 지키려다 삶의 생생한 감정을 모두 놓쳐버린다. 그는 켄턴 양과의 인연을 버리고, 주인과의 맹목적인 '의무'라는, 그 기치도 불분명한 본인만의 낡은 신념으로 스스로를 가뒀다. 결국 스스로 만든 품위라는 감옥에 갇혀 우물쭈물하다 달콤씁쓸한 황혼을 맞이했다.
나는 소설의 결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황혼의 때를 마주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다행스러운 일이다. 돌이키기 늦었다고 한탄하기보다 스스로를 직시하고 위안할 수 있는 시점이 비로소 찾아와서다. 늦은 때란 없다. 깨달은 지금이 가장 빠른 시기다. 이 명제를 내 20대를 지배했던 신앙의 문제에 적용해본다면 어떤가.
내가 확신하는 바는 내 안에 기독교적 교리나 신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체험은 그저 가시적 도구라 판단한다. 기독교 특유의 위선은 내가 경멸하는 지점이다. 기독교인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지 않은 채 인간의 생물학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신의 뜻'으로 교묘히 위장했다. 긍휼을 가장한 시혜적 태도로 타인 위에 서려는 오만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관계의 관성이나 스스로 세운 거창한 품위 때문에 이 기만을 단호하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타인이 내세운 결론이나 사회의 구조적 틀에 억지로 끼어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플라톤주의자처럼 이상향을 좇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에피쿠로스의 사고관에 적극 동의한다. 앞으로 나의 최우선 과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파악하고 이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내 안의 모순과 혼합을 억지로 뜯어고치거나 검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단단하게 포용해야 한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내 기질과 한계를 명확히 인정하고, 이 토대 위에서 내 주체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행복은 뒤로 미룬 채 쓸데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의미하게 인생을 낭비한다. 나는 더 이상 공허함의 장엄한 총체에 불과한 온갖 사소한 일들에 매달려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 속에서 실존은 지속기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3분간의 짧은 춤이든,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이든 인간이 실존적으로 결단하는 밀도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양 사건의 실존은 비교할 수 없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품격이라는 이름 아래 진짜 가치를 잃어버린 스티븐스의 후회를 반면교사 삼았다. 그는 80세의 자신을 상상하며 후회를 가장 안 하는 선택을 내리는 '후회 최소화 전략'를 펼쳤다. 단기적 안정(고소득 금융직)을 버리고 장기적 관점(창업)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결단을 내렸던 그처럼, 나 역시 남은 나날들을 공허한 품위 대신 후회를 최소화하는 실존적 선택으로 채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사유는 한 개인을 바꿀 수 없다. 매 순간의 사소한 결단이 축적되면 내가 탄생한다. 인간은 매 순간의 선택이 쌓여 만든 총체적 존재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실존은 결단이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라는 허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절대적 진리가 부재한다는 니체적 허무주의를 온전히 수용한다. 동시에 '실용적 허구주의자'로서의 스탠스를 취할 것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진단에 동의하지만, 마르크스처럼 그 아편을 전면 거부하지는 않겠다. 인간의 나약함과 현실의 부조리로 인한 정신적 붕괴를 막아내는 '생존의 진통제'로 인지한 상태에서 기꺼이 삼킬 것이다. 나의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
철학은 관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유에만 그치는 것은 철학하는 '척'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머리로 통제하며 스스로를 가뒀던 무거운 갑옷을 이제 벗어던지려 한다. 에피쿠로스적 평온과 주체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품위'에서 벗어나 가볍고도 경쾌하게 행동하는 진짜 실존의 삶으로 향할 것이다. 니체가 주장한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