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전부터, 지금 일하고 있는 호텔에서 스태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런치와 디너를 엄청 준비할 예정이고 펍에서 주류 무제한 제공한다 해서 나름 들떴었다. 어젯밤엔 파트너가 좋아하는 간식들이랑 양말, 카드 등 선물도 준비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간식거리들도 주고 해서 42도 땡볕더위지만 정말 한 해가 끝나는구나 하는 느낌을 살짝 받았었다.
성탄절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2시간 전 엄마가 보낸 문자가 한 통, 부재중 카톡 전화가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엄마 아빠는 곧장 시골로 내려가고 계셨다. 바로 전화를 해서 엄마는 어떤지, 상황은 어떤지 그런 얘기를 했다. 가지 못 해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는 괜찮다 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눈물이 났다.
2019년 7월, 호주에 오기 직전 딱 한 번 방문했던 요양원. 그곳에서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눈물 흘리던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정말 총명하셨던 분이었지만 난 사실 할아버지를 잘 몰랐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납치되어 일본에서 재교육을 받으며 강제노동에 징집되기도 했고 해방 직전 할아버지와 친했던 한 일본군인이 몰래 할아버지의 여권과 비행기표를 준비해 한국으로 급히 탈출시켰던 이런 이야기 모두 요양원에서 처음 듣기도 했다. 옆에서 엄마가 그치 그랬다며- 하시는데, 나는 처음 듣는 영화 같은 이야기에 놀랐었다. 왜 그 전엔 그분에게 더 궁금한 게 없었을까 후회가 됐다. 이제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볼 수 없다.
서울대 간 사촌들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 해 날 예뻐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가 조금 야속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시골에 내려가면 늘 기뻐하셨는데, 그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진다.
밭 놈은 밭에서 일해야 한다며 평생 농사지으신 할아버지. 가난해도 자식들 교육을 위해 몸 바쳐 일하신 할아버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던 강직하신 분이었다.
사오 년 전, 밭을 매다 뒤로 넘어져 바로 뇌졸중에 합병증으로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전까진 정말 멀쩡하셨던 외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일주일도 안 되어 갑자기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그러다 그렇게 요양원에서 천천히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의 부인이 먼저 가신걸 모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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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수십 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외삼촌을 드디어 하늘에서 만날 수 있으시겠군요. 자식을 먼저 보내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일곱 살 어린 저는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얼마나 힘들고 그리웠을지 생각하면 먹먹해집니다. 그리고 할머니도 다시 뵐 수 있겠네요. 그곳에선 부디 가난과 노동에서 벗어나 편히 쉬시길, 평생 전쟁의 후유증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룩졌던 고통이 없기를. 가시는 곳을 배웅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과 당신이 살아계시던 생전에 더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 모두 담아 당신의 영면을 위해 기도합니다. 편히 쉬세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