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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Mar 22. 2019

피로사회와 게으름의 미학

네가 노-오력을 안 해서

 2000년대는 과히 노력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10대부터 80대까지 손에 자기 계발서 하나쯤은 쥐고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 출간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세간의 비판을 받고 열정 페이 논란이 KBS 8시 뉴스에도 등장하면서 이러한 노-오력의 사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균열이 생겼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3포 세대라 불리던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 이제는 5포, 7포 세대로 자리를 잡았고 '헬조선'이란 단어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더는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청년들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신세를 한탄할 뿐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브런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키워드는 단연코 '퇴사'다. 죽기 살기로 대기업에 취직해봐야 3년을 채 버티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보니, 직장인들 사이에서 퇴사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 죽을 인생, 청춘이 아깝다며 퇴사 후 모아둔 돈으로 여행하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철없는 한량쯤으로 불렸을 사람들은 YOLO족이 되어 세간의 부러움과 질타를 한몸에 받았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에서도 노력에 대한 환상이 저물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에세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표지 출처: 책읽찌라 유튜브 채널


 시류에 따라 출판계의 동향도 자기 계발 서적에서 힐링 에세이 서적으로 변화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작가군의 변화다. 자기 계발서를 쓰려면 적어도 남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직함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의 베스트셀러 서적의 작가들은 평범한 직장인인(또는 이었던) 경우가 많다. SNS나 온라인에서 쓰던 글들이 인기를 얻어 책을 출간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4시간씩 자며 목표를 위해 노력하라는 말보단 사람들은 게으르고 뒤처져도 괜찮다는 말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과연 노오력이 부족한 '요즘 사람'다운 현상이다.




피로사회


 여기, 이미 7년 전 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자기 계발서 시대를 경고한 책이 있다. 바로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다. 피로사회는 출간 즉시 독일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철학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저자는 현대의 성과사회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자기 착취의 시대로 정의한다. 이는 긍정성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긍정성의 폭력은 타자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으로 어떤 것을 빼앗기보다는 포화시키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킨다. 달리 말해,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부정성 대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자기자신을 착취하고 고갈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대학생의 대외활동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다. 대외활동이 많이 보편화된 2016년에도 1학년 때부터 대외활동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1학년이 벌써 대외활동을 한다고 놀라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불과 2년 사이에 각종 대외활동에서 1학년의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고 이제 그 사실을 놀라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미 자리를 잡은 직장인들 또한 미래를 위해 새로운 자격증을 따거나 교육을 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렇다고 누군가 이들에게 '이래야만 한다' 또는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는 그저 "취업난이 갈수록 심해지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할 뿐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피로사회, 28p-


 이러한 상황은 겉으로 보기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가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외부 기관의 규제에서 자유롭다. 신분제가 사라졌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성별의 제한이 사라졌고, 더는 정부가 야간 통금을 시행하거나 머리를 자르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배 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알아채기도 힘든 데다 타자의 착취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쉽게 말해, 누군가 토익점수 800점을 유지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여러분도 '노력'만 하면 유수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착취는 두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첫째, 성과사회, 자기 착취의 사회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무시한다.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4시간씩 자며 모든 역경을 이겨낸 '노력형 인간'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얼마나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든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보다는 처지가 좋으니 노력을 하라는 말로 귀결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당장 대학원에 진학할 돈이 없는 사람에게 '누구누구는 아르바이트를 3개씩 하며 대학원에 갔다더라'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분명히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유발하는 주체를 명확히 명명할 수 없으므로 그 원인을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에 귀를 막고 오로지 비난의 화살을 개인에게 돌리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사색적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 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중략)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피로사회, 32p-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성과 사회의 활동 과잉이 사유의 부재를 야기한다는 데 있다. 성과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개인은 불안하다.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은 사치고 노동하지 않는 자는 죄인이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성과사회에서 시간을 가지고 깊이 사색한다는 것은 곧 뒤처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러한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에 끊임없이 몸을 내맡긴다.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자극이 옳고 그르냐를 따질 시간은 없다. 잠시 멈춰 서서 소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 따위는 더더욱 없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이제 사람들은 자극의 부재라는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심지어는 화장실을 가거나 샤워를 할 때조차 스마트폰을 가지고 간다. 무분별한 자극의 수용은 즉각적인 마녀사냥으로 이어진다. 마녀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찰나의 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사실여부보다 중요한 건 순간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찬찬히 고민하는 것보다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이 더 중요한 10대 아이들에게 진로란 희뿌연 안개와도 같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지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흉악범죄는 줄어들 생각이 없고 혐오와 반목이 범람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 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 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피로사회, 48p-


 저자는 활동 과잉을 정신적 탈진 증상으로 설명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로 인해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그리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머뭇거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는 멈출 줄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성장의 정체는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현대 사회는 분노하지 않는다. 잠시 멈춰 서서 넓은 지평으로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짜증을 내는 것에 그친다. 쏟아지는 자극에 저항할 줄 아는 것. 가만히 앉아 돌이켜 생각하는 것. 관조하는 것. 저자는 계속 걷기만 하면 기껏해야 달릴 수 있지만 걷기를 멈춰 서면 춤을 출 수 있다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과 창조적인 발전은 '활동'이 아닌 '사유'로부터 기인함을 강조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이었다. 질병과 부상은 예부터 큰 걱정거리였지만 이렇게까지 운동과 식품에 열광적이었던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건강한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중들은 피로사회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작년부터 건강만큼이나 '워라밸'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비로소 사람들이 생존의 문제만큼이나 좋은 삶에 대한 문제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의 홍수에서 벗어나 디지털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도 생겼으며 드물지만 짜증이 아닌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등장했다. 그리고 서서히, 모두가 죽어라 뛰는 경주에서 우뚝 멈춰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2017년 12월 성인 남녀 1000명 조사 출처: 발명진흥회(닐슨 코리아)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 따위의 계급투쟁론을 주장하거나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우리 모두 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작정 퇴사를 우상화하거나 회사를 박차고 나온 사람들을 치켜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울증 발병률과 자살률이 세계 최고치를 경신하고 학교, 직장 할 것 없이 왕따 문제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미약하나마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 뿐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단순히 퇴사자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라기보다 달리기를 그만둔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참신한 시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다 같이 뛰는 것을 멈추고 강강술래를 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도 부단히 보고, 읽고, 써서 가끔은 멈춰서는 삶을 살고 싶다.


  


*보라색 글씨는 <피로사회>의 본문 중 발췌하였으며, 나머지 글은 저의 사견임을 밝힙니다.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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