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뉴스에서는 몇 년째 일자리 감소, 취업난이라는 단어가 끊이질 않고 20명을 뽑는 공무원직의 경쟁률이 수 백대 일이 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된다는 말은 전설이 된 지 오래다. 한창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논란이었던 때가 있었다. 청춘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파도, 고생해도 괜찮다고 넘어가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그 원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정 페이’ 논란이 그 뒤를 이었다. 취직이 힘든 젊은이들을 상대로 무급으로 일을 시켜 가뜩이나 취업난이 극심한 시대에 취준생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성세대에게 '요즘 젊은이'란 버릇없는 게으름뱅이일 뿐이다. 여기 이런 기성세대를 향한 발칙한 반란을 다룬 영화가 있다. 바로 <장기왕 : 가락시장 레볼루션>이다.
4년제 인 서울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에 번번이 실패한 한두수(정두원)는 어머니 몰래 가락시장 청과물 배달 일을 하게 된다. 고용주와 내기 장기를 두던 두수는 그의 능력을 알아본 동료 장 씨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장기의 메카, 탑골공원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수는 탑골공원 앞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고등학교 첫사랑, 민주(최시온)를 만난다. 그녀를 따라 노숙자 쉼터 철거를 막기 위해 노력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던 두수는 곧 쉼터의 건물주가 탑골공원 내기 장기의 검은손, 박영감(이장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장기 내기를 통해 박영감으로부터 쉼터를 지키기 위해 일생일대의 대결에 참여한다.
<장기왕 ; 가락시장 레볼루션>은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서울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취직을 하지 못해 청과물 시장 배달을 하는 두수, 취직을 했지만 끊임없이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두희, 배우라는 꿈과 자장면 배달일이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는 낙훈까지. <장기왕 ; 가락시장 레볼루션>이 이다지도 다양한 형태의 청춘들의 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정다원 감독 또한 아직 청춘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머니나 장 씨 아저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이 너무 답답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눈빛이 너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퇴직한 자신의 아버지와 박영감의 수하들을 동일시하는 장면을 통해 기성세대의 고충 또한 이해하고 보듬는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연민, 불신과 이해라는 청춘들의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 씨 아저씨가 두수에게 했던 '미안하다.'라는 대사와 두수가 우연히 마주친 재수생에게 했던 '미안하다.'라는 대사가 오버랩되면서 결국은 우리 또한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기성세대 또한 우리와 같은 청춘을 보냈던, 똑같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대사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씁쓸한 조소를 함축하고 있다.
두수와 민주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있던 민주는 가방 속에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리게 되고 두수는 그 물건 중 하나인 '체 게바라'라는 책을 주워 준다. 두수는 몰래 그녀를 흠모하며 그녀를 따라 책을 구매한다. '체 게바라'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거대한 주제를 상징하는 첫 번째 소재다. 그는 민중을 위한 혁명가이자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젊은이들의 추앙을 받는 멘토로 이러한 체 게바라의 등장은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청춘들에게 기성세대의 틀을 깨부수자는 혁명을 부르짖는 듯 느껴진다. 영화 앞머리에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가슴속에 이룰 수 없는 큰 꿈을 꾸어야 한다.’라는 체 게바라의 명언이 나온다. 문득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현실 속에서 큰 꿈을 꾸며 결국은 그 꿈들을 이뤄나갈지 그들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두 번째 주요 소재는 당연하게도, 바로 장기이다. 등장인물들 모두 장기로 따지면 가장 쓸모없는 졸들에 불과하지만 결국 박영감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결정지었던 영웅 또한 바로 그 작고 힘없는 졸이 아닌가. 장기, 그 자체가 작고 힘없는 우리일지라도 혁명을 이뤄낼 수 있다는 든든한 다짐의 표현이다. 가락시장에서 운송을 책임지는 일명 딸딸이 계약직 두수는 가락시장 장기왕답게 왕관을 쓰고 있지만, 항상 어른들의 멸시와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힘없는 졸(卒)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청춘들 또한 힘없는, 또 다른 졸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상대방을 향해 앞으로 또는 옆으로 오직 전진만이 가능한 졸은 대국 종반에 가서 의외의 묘수가 되어 판을 뒤집는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만만한 그 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낙훈과 두수가 영어단어를 외우던 것을 떠올린 두수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재수생에게 ‘장기나 한 판 둘래?’라고 묻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필수 스펙’인 영어가 아닌 어른들의 놀이라 일컬어지는 장기판에서 세상을 바꿀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두수의 깨달음이 담겨있다. 박영감과의 장기 내기 이후 두수의 변화는 두수의 의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반의 두수는 어머니께 가락시장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양복과 가락시장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생활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는 집에서도 가락시장 유니폼을 입으며 거울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짓는다. 영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청과물 배달 일이 더 이상 부모님께 숨겨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4천여 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장기’와 20세기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고단한 청춘을 상징하는 주인공 두수의 만남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경직된 시스템과 수많은 편견들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뒤집고 비튼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다 익어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라는 체 게바라의 말처럼 답답한 현실에서 그들이 날리는 한방은 그래서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내용적으로도 굉장히 짜임새 있는 구조이지만 <장기왕 : 가락시장 레볼루션>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연출에 있다. 장기 대결 때마다 사용되는 클래식 음악들과 마치 웹툰의 한 장면 같은 긴박감 넘치는 편집은 마치 한 편의 무협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청과물을 배달하러 가는 두수와 박영감과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훈련하는 두수가 서로 돌아보는 장면은 마치 타임슬립 물의 한 장면만큼이나 강렬하다. 두수의 자기소개 장면 또한 수미상관 구조로 이어져 있는데 청과물을 배달하는 두수의 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마지막에는 주위 사람 모두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각박한 틀 속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기왕 : 가락시장 레볼루션'이 여타 사회고발적 영화와 갖는 확연한 차이점은 그 어떤 시련과 역경이 닥쳐와도 코믹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려 한다는 것에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조직 사회의 부조리함과 취업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순히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부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어려워도 우리는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라는 메시지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더 힘차게 살아가야겠다는 힘을 준다. 영화는 계속해서 말한다. 청춘들이여, 체 게바라가 되자. 그리고 왕을 쓰러뜨리는 졸이 되자.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