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인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있다.'고 했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적인 사람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이렇게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혹자는 그 사람과의 추억을 지우는 것조차 안타까워 그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가거나 오히려 너무 고통스럽기때문에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대립적인 애도의 방법에 대해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한 남자가 아내의 죽음을 뒤로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주 긴 변명'을 늘어놓는다.
유명한 작가인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는 다른 여자와 외도 중 버스 사고로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찰의 사고 성명서 발표 자리에서 아내와 함께 여행갔던 유키(호리우치 케이코)의 남편 요이치(타케하라 피스톨)와 그의 아들, 딸을 만나게 된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는 요이치의 불쑥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요이치 가족에게 마음의 문을 열던 중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나타나고 사치오는 고주망태가 되어 요이치 가족에게 망언을 쏟아낸 후 아이들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요이치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게 된 사치오는 황급히 아이들과 재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유레루>(2006),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2009)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은 이전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이나 소멸을 중심으로 서사과정을 발전시켜 나간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린 아내와 그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는 남편. 동일본 지진의 수많은 희생자를 보며 이 영화의 소재를 떠올렸다는 감독의 인터뷰처럼, 이 영화는 두 가족의 아내 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죽음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이들의 죽음으로 파생되는 인생의 철학적 질문들에 대해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소재의 공통점을 제외하고도 니시카와 미와 감독 영화의 특징으로 소설이 빠질 수 없는데,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아주 긴 변명은 소설이 먼저 창작되고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의 세세한 배경들-사치오의 대학시절 연인, 요이치의 학력과 같은 것들-을 소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듯 탄탄한 인물들의 구축은 아주 긴 변명이 흡입력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이 되어 주었다.
언젠가 김갑수 작가의 작업 인문학에서 여자는 자신의 잘난 면을 과시하는 남자보다는 어느 정도 결핍이 있는 남자에게 더 끌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녀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은 모두 사회에,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느낄 때 상대에게 더 매력을 느끼고 삶의 동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이는 사치오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인간미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내와 외도 상대는 물론,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사치오는 자의식이 넘쳐 흐름에도 스스로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 묘사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굉장히 꺼려지는 인간 군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사치오가 요이치를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나무꾼을 연상케 한다. 자신의 공허하고 메마른 감정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인간'의 감정을 가진 요이치. 그에게는 그가 너무나도 필요로 하는 사람인 유키와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 어쩌면 요이치의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사치오의 갑작스러운 결정에는 이 가족이 갖고 있는 결핍이 어쩌면 자신을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줄 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담긴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요이치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사치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을 담아낸다. 아내도 죽고 자신의 불륜 상대 또한 떠나가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다가온 것이 바로 신페이와 아카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잠시, 자신과는 달리 아이들과 함께 놀러간 과학관에서 만난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요이치를 보며 사치오는 묘한 자격지심에 휩싸인다. 자신보다 훨씬 학력도, 소득도 낮는 요이치가 다른사람에게 더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분노는 결국 선생님과의 식사자리에서 폭발하고 만다.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것,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자신이 여태까지 회피해왔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법. 그렇게 사치오는 자신의 결핍에 대한 인정을 통해 관계의 미학에 대해 서서히 깨닫는다. 자신의 결핍에 대한 인정과 나를 필요로 하는 타자와의 결합이 만나 인생의 진리에 대해 깨닫는 과정은 마치 잘 묘사된 한 권의 심리소설을 읽는 듯 세밀하고 감정적이다.
사치오가 떠나 간 요이치의 집은 다시 엉망이 되고 만다. 전국으로 트럭을 운전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직 중학교도 가지 않은 요이치의 아들 신페이가 가장 노릇을 하며 어린 여동생 아카리를 돌본다. 때문에 학원은 몇 주 째 다니지도 못하고 설거지거리와 집안일들이 쌓여간다. 이러한 신페이에게 유키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가 아버지를 향한 원망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모진 말을 들은 요이치는 심란해하다 결국 교통사고를 내고 사고 소식을 들은 사치오는 허겁지겁 요이치의 집으로 향한다. 다시 자신이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아카리를 선생님 집에 맡기고 신페이와 함께 요이치의 병원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신페이는 엄마의 죽음 이후 자신은 울지 않았다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엄마 대신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 대사를 통해 관객들은 신페이와 사치오가 얼마나 닮은 인물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때문에 사치오가 신페이에게 건네는, '소중한 사람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조언은 마치 사치오가 스스로에게 '다시는 아내처럼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말라'는 다짐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사치오는 삶의 중간 중간 영감을 받아 글을 한 줄 씩 쓰곤 한다. 그리고 요이치에게 신페이를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치오는 아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쓴다. 사치오가 아내의 죽음을 뒤로 하고, 아니 모든 인간들이 고통과 역경을 뒤로 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아주 긴 변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생은, 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