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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May 17. 2019

광야의 돈키호테

그는 정말 돈키호테가 되었을까

 소설이든 영화든, 작품 외적의 요소들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텍스트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한 제작 과정과 감독의 인생을 논하지 않고는 영화의 운을 떼기도 어려운 탓이다.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 실사화 계획을 세운 시점부터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개봉하기까지 장장 20년이 걸렸다. 돈키호테 제작 과정의 우여곡절은 이 영화의 이름만 검색해도 줄줄이 나오기 때문에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래도 아예 언급을 안 할 수는 없으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2000년대 초, 테리 길리엄은 돈키호테 제작비를 지원받는 데 성공하지만 물색해 놓은 장소의 소음이 너무 커 촬영이 어려웠고, 폭우로 촬영장이 무너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게다가 돈키호테 역을 맡은 주연 배우가 전립선염에 걸려 말을 탈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첫 번째 돈키호테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문제는 한때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던 테리 길리엄의 영화가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줄줄이 혹평을 면치 못했고, 이 때문에 돈키호테 제작비 펀딩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유명 배우들을 섭외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테리 길리엄은 약 10년간 번번이 제작비 문제로 돈키호테를 떠나보내야 했다.    

돈키호테 촬영장의 악재를 담은 메이킹 필름, 로스트 인 라 만차

 2015년에는 드디어 펀딩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주연 배우 존 허트가 췌장암 판정을 받으면서 또 한 차례 제작이 무산되고 만다. 이쯤 되면 돈키호테를 찍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일 법도 한데, 돈키호테를 향한 그의 열정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리고 2018년, 그는 마침내 20년 인생을 대가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얻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돈키호테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빠듯한 예산에도 높은 제작비를 고집하는 테리 길리엄과 마찰을 빚은 제작자가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건 것이다. 다행히도 칸이 테리 길리엄의 손을 들어주면서 제71회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었지만, 파리 법원은 제작자 파울 브랑코의 손을 들어주면서 또다시 개봉이 불투명해졌다.


 테리 길리엄의 패소 이후 어떤 경로로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이 장황한 문단의 요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텍스트 그 자체로만 평가하기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화려하다는 것이다. 영화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바로 '그' 돈키호테는 소설 속 돈키호테만큼이나 기구한 여정을 거쳐 겨우 스크린에 당도했다. 그러니 첫 장면부터 돈키호테를 촬영하는 감독을 비추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불친절한 익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처음부터 테리 길리엄이 자전적인 영화를 구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돈키호테는 필연적으로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2018 칸 영화제. 왼쪽부터 테리 길리엄, 조나선 프라이스, 아담 드라이버


 졸업 작품이었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토비는 10년 후 돈키호테를 모티프로 한 광고를 찍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제작자와의 마찰로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과거의 촬영 장소를 둘러보던 그는 우연히 과거 돈키호테 역을 맡았던 하비에르를 만난다. 하비에르는 돈키호테 역에 캐스팅된 후로 자신이 정말 돈키호테라고 믿는다. 토비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 달아나지만 결국 산초가 되어 하비에르와 함께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기묘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 여정의 끝은 불운하다. 결국 토비는 하비에르의 운명을 이어받아 새로운 돈키호테가 된다.    


환상: 1. 환영 2. 사상이나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    


 환상, 이보다 더 테리 길리엄의 영화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 정답은 없다. 그의 영화는 어렵고 난해하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크리스토퍼 놀란 식의 퍼즐 같은 플롯과는 거리가 멀다. 쏟아져 나오는 상징과 뜬금없는 화면 전환 사이에는 일관적인 플롯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의 불친절함 때문에 그의 작품은 항상 0점과 10점을 넘나들지만, 그가 만들어낸 환상 속 철학의 깊이는 평점만으로 재단하기엔 그 깊이가 남다르다.     

 

 꿋꿋하게 자신만의 세계관을 고집하던 테리 길리엄의 환상성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선 자꾸만 현실의 개연성으로 대체된다. 스페인 내 중세 종교 전쟁은 토비의 꿈으로 밝혀지고, 중세 기사 갑옷을 입고 돈키호테에게 전투를 신청한 사람은 알고 보니 하비에르를 찾는 마을 사람이었으며, 말을 탄 둘시네아 공주는 사실 스페인 성주간 축제를 맞아 중세시대 옷을 입은 광고 제작자의 부인이었다는 식이다.


숲 속에서 마주친 둘시네아 공주. 양복을 입은 경호원과의 이질적인 대비가 인상적이다

 영화 속에서 환상이 현실로 대체되는 과정은 돈키호테의 환영만큼이나 낡고 억지스럽다. 그러나 소설 세르반테스가 그저 돈키호테의 무용담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듯, 돈키호테의 진부함을 단순히 조악한 유머쯤으로 치부하면 곤란하다. 처음에는 이상에 미쳐버린 하비에르를 비웃지만, 결국 토비는 환상이 현실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차츰 현실의 추악함에 눈을 뜬다. 현실이 뻔히 드러나는 '속 보이는' 환상성은 원작 돈키호테의 알레고리를 그대로 계승한 결과다. 달리 말해, 테리 길리엄이 그려낸 환상은 얄팍하지만,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토비가 겪었던 중세 종교 재판이 꿈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몰지각하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종교 재판이 현재 토비가 이민자들에게 갖는 편견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기사의 전투 신청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비에르에게는 현실이, 그리고 집이 자신의 신념을 시험받는 전투장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여정의 마지막, 하비에르는 자신을 돈키호테라 부르며 극진히 대하는 러시아 부호에게 속아 그의 초대를 받아들인다. 이성을 잃고, 이상에 매몰된 그는 결국 끝까지 부호의 사악한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분명 미친 것은 하비에르건만, 목마에서 떨어진 하비에르를 향해 웃음을 쏟아내는 ‘제정신’인 인간들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성주간 축제의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철저하게 짜인 각본 속 역겨운 유희는 돈키호테의 순수한 이상만을 더욱 돋보일 뿐이다. 토비는 하비에르의 마지막을 뒤로하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다. 이미 80세를 훌쩍 넘긴 테리 길리엄은 어쩌면 그 스스로 돈키호테가 되길 바랐던 것이 아니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로시난테 타고 오는 돈키호테가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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