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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Apr 12. 2019

인지 부조화와 피해자 죽이기

故 이순덕 할머니를 추모하며

  1960년 미국 듀크 대학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실험 참여자들은 다른 실험 공모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도록 요청받았다. 그 후 참여자들은 공모자들을 다시 평가했는데, 그 결과는 상당히 놀라웠다. 대부분의 참여자가 자신이 공모자들에게 한 적대적 발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비난이나 모욕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잔인함의 정당화는 자신이 믿는 바와 현실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 즉 인지 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생한다. 인지 부조화에 따른 자기 합리화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일까. 잔인함의 정당화는 실험실을 뛰쳐나와 현실에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정당화의 예다.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 주방위군은 반전 시위 중이던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과는커녕 피해자들은 임신했거나, 이(Lice)에 뒤덮였거나, 심각한 매독 환자였다고 변명했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 출처: www.history.com


 유전자에 아로새긴 본능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범죄 기사에서조차 ‘그러니 (피해자가) 처신을 잘했어야지’ 따위의 댓글이 달리고, 학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사에도 학살당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분석하기 급급하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는 특히 성범죄의 피해자에게 정당화의 폭력을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자행해 왔으며 심지어는 이러한 폭력을 피해자 스스로 내재화하기도 했다. 


  허스토리는 잔인함의 정당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이자, 피해자에 내재한 폭력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달리 말해, 허스토리 속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받는 고통의 결도 두 가지로 나뉜다. 가장 가시적인 것은, 역시 타자에 의한 폭력이다.


 피해자들이 탄 택시 라디오에서 종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뉴스가 나오자 택시기사는 ‘무슨 자랑이라고 저렇게 얘기하는지’라며 피해자를 비난한다. ‘쪽팔리게 뭐 하는 짓이냐’며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자 신고센터의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남성도 있다. 광복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의 처참한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마지막 양심의 항변이 피해자 죽이기라는 혐오스러운 합리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시모노세키 재판소 앞에서 일본 우익단체는 ‘자기들이 좋다고 몸 팔아 놓고 인제 와서 폭력을 운운하다니!’라며 피해자를 비난한다. 이 장면 역시 전범국의 초상이라는 일본의 현실과 훌륭한 나의 모국이라는 믿음 사이의 괴리를 줄이려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저지르는 폭력의 단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영화 허스토리 출처: Daum 영화


  피해자를 향한 타인의 비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피해자에 내재한 폭력적인 시선이다. 영화의 초반 한 할머니는 자신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피해자로서 증언하는 것을 거부하고, 배정길 할머니는 자신이 아이를 안고 있다는 이유로 친구가 대신 일본군에 끌려가는 모습을 관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들에게 맞고 살면서도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정신대 피해자였던 서귀순 할머니는 당신은 그래도 위안부는 아니었다며 다른 피해자들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배정길 할머니는 일본 재판관 앞에서 당당히 말한다.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고, 일본군의 잔혹한 성적 유린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라고. 친구가 끌려간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며 나는 그저 잔인한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배정길 할머니의 이러한 깨달음은 사회가 얼마나 피해자에게, 특히 성범죄의 피해자에게 잔인함의 정당화를 내재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더는 폭력적인 시선에 억압될 필요 없이 가해자를 당당히 비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재판을 앞두고 일본으로 향하는 길에서 택시 운전사에게 당당히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는 박순녀 할머니의 모습은 범죄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일본 재판관 앞에서 증언하는 서귀순 할머니의 모습 / 영화 허스토리 출처: 씨네21


  허스토리는 일본의 과거 행적과 그에 대한 현재의 태도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보내는 시선 또한 고발한다. 위와 같은 종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시선의 변화는 기존의 위안부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이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부끄러운 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관부재판의 주요 원고셨던 故 이순덕 할머니 출처: 한겨례신문


 일본 종군 위안부 최고령 피해자이자, 관부재판의 주요 원고 중 한 명이었던 故 이순덕 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찾아왔으면 한다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북적였다. 영화 속 대한민국과는 달리 현재의 대한민국은 더는 피해자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피해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인지 부조화와 자기 합리화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것은, 비겁한 본능을 이겨내고 타인을 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위안부 생존자가 23명으로 줄어든 지금, 하루빨리 일본이 비겁한 본능을 이겨내고 적절한 사과와 배상을 하길 간절히 기원한다. 



논문 출처


Davis, K. E., & Jones, E. E. (1960). Changes in interpersonal perception as a means of reducing cognitive dissonance.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61(3), 402-410.


원문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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