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지키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중학생인데 콘돔이 없어서 랩을 감고 성관계를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랩이 벗겨졌어요. 임신 안 하겠죠?” 올해 3월 한국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지식iN’에 한 십대 여성이 올린 경악스러운 질문이다. 질문자는 “제가 어려서 그런데 임신 가능성 좀 봐달라”며 “관계 도중에 랩이 여러 번 터지기도 했다”라고 적었다. 이 게시물을 읽다가 기시감이 들었다. 수년 전 청소년의 성문화에 대해 기사를 쓰고자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던 중에 비슷한 내용을 본 게 기억났다. 네이버 지식iN에서 여러 검색어를 조합하여 과거 글을 찾아봤다. 2008년에도 비슷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한국에서 청소년이 성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삼촌이나 부모님이 서재에 숨겨둔 포르노 비디오를 통해 처음 이성의 벗은 몸을 접했다고 고백한 바 있고, 오래전 필자는 중학교 수업 시간 바나나와 오이 등에 콘돔을 끼워보는 체험 학습을 통해 처음 ‘콘돔’이라는 것을 만져봤다. ‘야동(야한 동영상, 포르노)’으로 남보다 빨리 성에 눈떴다고 해도 성에 대한 무지함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지간한 야동에는 콘돔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전 세대에게는 성교육 전문가 구성애가 있었다. 구성애는 1998년 MBC <구성애의 아우성>, 1999년 SBS <우리 아이들의 성> 등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전달해 화제를 모았다. 그의 강연이 화제가 되며 사회적으로 ‘아우성(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 신드롬이 일기도 했다. 2001년에는 ‘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라는 뜻의 성 상담 센터 ‘(푸른) 아우성’을 열고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요즘 구성애가 누군지 아는 학생이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구성애 이후로 이렇다 할 성교육 전문가가 대두된 적도 없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제대로 된 성교육에 앞서 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많지 않다. 물론 요즘 학생들이 예전 학생들과 다르기도 하다. 알음알음 친구를 통해 야동을 비디오로 빌려보던 학생들은 이제 스트리밍 사이트와 각종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를 통해 손쉽게 전 세계의 야동을 찾아본다. 야동으로 왜곡된 성관계를 접한 이들은 체외 사정을 해도 임신하지 않는다거나, 콘돔을 쓰지 않고 삽입해야 상대가 더 좋아한다는 식의 잘못된 정보를 얻게 된다.
한국에서는 평균적으로 1년에 13세 이하 ‘어린 엄마’가 6명가량 탄생한다. 통계에 잡힌 게 이 정도이니 통계에 잡히지 않은 ‘어린 엄마’는 더 많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14년 조사한 ‘19세 미만 청소년 분만·유산 통계(2011~2013)’에 따르면 이 기간 분만 인원은 1891명, 유산 인원은 338명이었다. 조사 기간 내 청소년 2229명이 임신한 것이다. ‘최근 3년간 임신, 출산 및 산후기 질환의 최소 연령별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 분만한 13세 이하 유소년은 18명이었다. 정부가 출산율 저하로 고심하고 있지만 비자발적인 미혼모, 특히 미성년자 미혼모는 늘고 있는 형국이다.
여성가족부가 2014년 진행한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2012년과 비교했을 때 청소년의 성경험은 4.3%에서 5.3%로 1%p 증가했다. 성관계 시 피임 실천율은 중·고등학생이 39%, 위기청소년(청소년 쉼터나 소년원, 보호관찰소에 있는 청소년)이 36%였다. 성관계 경험자 중 성질환에 감염된 경우는 중·고등학생이 9.1%, 위기청소년이 12.8%였다. 위기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한 위기청소년은 43.4%였다. 중학교 1학년(21.9%) 때 성관계를 처음 한 청소년이 가장 많았다. 성관계 시 피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약 40%로, 특히 남자 청소년은 약 45%가 전혀 피임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지난 1년 간 성교육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65.2%만이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임신을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답한 여자 청소년의 21.4%가 그렇다고 답했고 이 중 79.1%는 인공임신중절수술(낙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청소년 전용 콘돔 자판기가 등장하고야 만 것이다. 소셜벤처기업 ‘인스팅터스’가 직접 개발한 콘돔을 청소년에게 무료로 배달해주는 ‘프렌치 레터(French Letter·콘돔의 영어식 은어)’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자판기다. 해당 기업은 오프라인에서 콘돔을 사는 것이 부끄럽고 곤란한 청소년에게 매월 초 우편으로 콘돔 2개씩을 보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다 우편은 청소년이 다가가기 어려운 방식이라는 생각에 자판기 보급에 나서게 된 것이다.
청소년 전용 콘돔 자판기에서는 개당 1400원인 콘돔 2개를 단돈 100원에 판매한다. 원래 콘돔을 사는 데에는 연령 제한이 없지만, 이 자판기는 청소년의 콘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 19세 이상은 이 자판기를 이용할 수 없다. 수익금 전액은 서울시립청소년건강센터 ‘나는 봄’에 기부한다. 현재 청소년 전용 콘돔 자판기는 서울 2곳과, 전남 광주, 충남 홍성 등지에 설치됐다.
“청소년의 성관계를 장려하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다. 실제로 충남 홍성의 만화방에는 주민의 요청으로 자판기 설치가 이뤄졌다. 인스팅터스 측은 “청소년들이 심리적 부담감, 죄책감 없이 콘돔을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는 자판기를 무료로 설치하기를 희망하는 사장님들의 문의를 받고 있다”라고 밝혔다.
사실 청소년 전용 콘돔 제공은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금 한국의 청소년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성교육이다. 모두가 안다. 하지만 어떻게 제대로 교육할 것인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성관계를 하면 안 된다며 시대착오적인 교육을 강요한다 해도 과연 이들이 성관계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에 대해 꽁꽁 숨기다 보니 왜곡된 성지식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확률만 높아지고 있다. 이 순간에도 청소년들은 랩, 비닐장갑, 비닐봉지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썼던 콘돔―모두 실제로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지식iN에 적힌, 학생들이 성관계할 때 사용된 기상천외한 콘돔 대용품들이다―을 씻어서 재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수업 시간에 의무로 틀어주는 비디오 몇 시간으로는 제대로 성을 배울 수 없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어린 시절 실패한 성교육―예를 들어 초등학생 대상으로 아이를 낙태하는 장면이 그대로 담긴 비디오를 틀어주는 것―을 받아본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선’을 지키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일단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어리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성 친구를 사귈 때는 계획을 세우고 성적 자극을 피한다.” “선정적인 행동을 하거나 옷을 입으면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다.” 한 지역 청소년 센터의 성교육 자료 내용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성교육은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한국에 등장한 청소년용 콘돔 자판기를 두고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영문 버전은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thedissolve.kr/why-condom-vending-machines-appearing-for-korean-te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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