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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우보이 Jun 09. 2017

키보드 키캡 놀이 시작

스페이스바 득템

작년에 node.js 학원을 다닐 때, 강사님께서 조그맣고 오래돼 보이고 저렴해 보이는 키보드에, 덕지덕지 키캡 색을 바꿔놓아 '왜 그러시는거지?'했던 기억이 난다. 


출처: DaoCloud / flicker

정확히 위 키보드와 같진 않았지만 아무튼 비슷했다. 그리고 맥북을 쓰면서 키보드를 따로 가지고 다니는 것도 되게 이상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키보드는 싸구려 오래된 키보드가 아니고, 키보드계의 유명한, 그리고 정말 비싼 (30만 원 대가 넘는) 전설적인 '해피해킹'이라는 키보드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어느새 노트북과 별도로 키보드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왜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다. 마치 사무라이한테 왜 자기 칼 들고 다녀요?라고 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사무라이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은 아르바이트 겸 회사에 나가 계산서 처리를 하고 이메일을 쓰는 일을 반나절 하는데, 매일 아침에 와서 키보드 연결하고 일 끝나면 키보드를 다시 빼서 집에 가지고 가는 게 되게 이상해 보였나 보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레오폴드 기계식 갈축 키보드


다른 팀에서 

'아니 왜 키보드를 가지고 다녀요?'

'키보드 되게 오래 돼 보이는데?'

라고 물어볼 때마다, 도저히 그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기에 일단 자리에 앉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에 키보드를 쳐 보라고 한다. (키보드 매니아들은 타건한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쓰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똑같은데요?'

'여전히 왜 가지고 다니는지 잘 모르겠네요.'

라고 대부분 답을 한다. 그러면 나는 여기서 씩 한 번 웃어주고 '그냥요'라고 쿨하게 대답할 뿐이다. 


중고나라에서 싸게 구한 레오폴드 하얀 휴대용 키보드는 키캡을 여러 색깔로 바꿀 수 있는 일명, ''를 하기에 어렵다는 사실을 최근에 접했다. 충격적이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안 된다고 하니깐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말로 그게 사실인지 온갖 사이트를 다 뒤져보기도 하고, 호환이 되는 키캡이 있는지 외국의 아마존 및 중고나라를 한참 뒤지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는 무릎을 꿇고 한 동안 밥맛이 없게 되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쯤 돼서 '이 브런치 작가는 정신병이 있는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시고 글 읽는 것을 중단하시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다)


영업직에서는 생각보다 이메일로 상당히 많은 글자를 키보드로 적게 된다. 키보드를 또각또각 적는 즐거움마저 없으면, 정말로 이메일 쓰는 그 시간은 노동 그 자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손가락에 부담을 덜 주고, 또한 또각또각 소리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꽤나 가치 있는 투자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큼은 정말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내겐 키보드가 2개 있는데, 작년 퇴사 기념으로 나 스스로에게 선물한 해피해킹 키보드와 '키보드계의 끝판왕' 자웅을 겨루는 리얼포스 87U 무접점 키보드, 그리고 최근 얻게 된 레오폴드의 갈축 기계식 키보드가 있다. 무게 때문에 집에선 주로 이 리얼포스로 작업을 하고 밖에 돌아다닐 때는 하얀색 가벼운 (상대적으로) 레오폴드를 사용한다.


주변에 귀여운 색의 키캡을 가지고 코딩하는 동료들을 부러워하기를 몇 개월, 나는 키캡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레오폴드 갈축 기계식 키보드에는 어렵고, 집에서 사용하는 리얼포스 키보드에는 아주 구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키캡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대충 삼각 김밥으로 몇 번 때워 절약한 밥값으로 국내엔 재고가 없고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무료배송으로 스페이스바를 주문하게 되었다. 무려 3주 만에 바다를 건너 대륙에서 건너온 스페이스바. 오늘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지를 뜯자, 노랗고 노란 너무나도 귀엽고 환상적인 스페이스바가 2개 들어있었다. (잠깐, 난 2개 안 시킨 것 같은데...) 너무너무 귀여워서 최근 체력적으로 힘든 것들이 많이 회복되었다. 어서 집에 가서 검은색 심심해 보이는 스페이스바를 바꿔보고 싶었다. 


노 란 색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3주간 기다려온 보람이 있다. 스페이스바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분위기가 바뀔 줄이야. 


이건 마치 남중, 남고, 공대, 군대 다녀온 남자 엔지니어들만 가득 찬 실험실과 같은 차디찬 연구소에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제국군들의 어두운 그늘 아래 하나의 빛이 되어 돌아온 루크 스카이워크와도 같았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식했던 박 전 대통령의 국정 속에서 빛났던 촛불과도 같은 이 스페이스바로 인해 지난 몇 달간의 체력적 피곤함이 싹 사라진다. 이렇게까지 오버하여서 말하는 이유는 스페이스바 키캡 하나를 15,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매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지만, 이 핑계는 분명히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나는 키보드계에선 초짜나 다름없다. 훨씬 더 많은 매니아들이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짜 매니아들은 키캡 하나 하나를 다 빼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고, 더 매니아들은 직접 키보드를 부품 하나하나 만들어 자신만의 커스텀 키보드를 손수 만들기도 한다. 또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 자신은 그냥 이 글을 읽고 계시는 ㄷ독자분들과 같은 '보통사람'임을 호소하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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