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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우보이 Jul 08. 2017

종교에 대한 실망

정말로 기도하면 세상이 바뀔까?

어릴 적 설악산 자락 시골에서 자라면서 일요일 아침마다 성스러운? 매주일 성당 미사는 내게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특히 매주 하는 성찬식에서 먹는 그 하얀 동그란 떡에 대한 욕심은... 사람은 무엇을 못하게 하면 괜히 호기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


문제의 그 성찬식 떡, 출처: catholic exchange


이 성찬식은 가톨릭에서 폐쇄적 성찬례(closed communion)이라고 해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어린 나는 당연히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홀로 멀리서 참여하고 저 떡을 먹는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은 대단하지 않은가. 저 떡이 뭐라고... 못 먹게 하니 더욱더 탐이 났다. 한 번만, 한 번만 가져와서 날 먹여달라고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거절하셨다.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5살이었다. 물론 21살이 돼서 처음으로 그 쌀과자 떡을 먹고 맛에 실망했을 때는... 산타클로스의 실체 이후로 말로 표현할 수 없던 충격이었다.


종교는 언제나 내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머리가 자라기까지의 고등학생 때까지, 별로 종교에 대해 열심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대학교 때, 성경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성경공부로 개신교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순진무구한 청년으로 교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교회 내 리더급의 순진한 청년으로 금방 변하게 되었다. (교회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정치적 정당과 비슷해서,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면 꽤나 빨리 그 안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신에 대한 호기심으로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교회 커뮤니티에 대한 호기심으로 교회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이민생활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승화시켰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어쨌건 여러 경로를 통해 성경 속의 하나님을(하느님을) 더 알게 되었으며, 교회 공동체에 대한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도 더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보여주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간극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었다. 뭐 사람 사는 세상이 언제나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건 철들지 않았던 내 나이에서도 이해하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 커뮤니티는 생각보다 그러한 간극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부인하고 거짓으로, 또 자기 해석으로 실제를 부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실제를 인정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행하고 따르는 예수의 제자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다수와, 또 교회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들은,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교회를 한때 열심히 다녔던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맞게 되는 교회 안에서의 방황을 거친 나는, 교회 커뮤니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주차봉사를 했던 내가 방금까지 교인 대표 전체 기도를 아주 은혜스럽게 ('은혜스럽게'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또 브런치 글을 몇 번에 걸쳐 쓸 만큼 할 이야기가 많지만) 교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장로들의 욕설과 짜증에 대한 간극 정도는, 교회 권력을 가진 자들의 하나님을 높이는 듯이 사기를 치는 경건한 모습에 비교해서는 굉장히 유치한 수준이었을 정도다.



아마도 더 바르고 건강한 기독교 가르침이 있겠지만, 내가 교회에서 배웠던, 또 더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캠퍼스 성경공부에서 배웠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이론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옆에 있는 것만큼 '배움'에 있어서 강한 영향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가 살아있을 시절, 예수 옆에 있었던 어처구니없던 집단들의 사람들이 변화했다고 알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를 활자 그 자체, text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우리들은, 이론에서 실제로, 이론에서 삶으로 변환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교회라는 조직은 어찌 됐든 '조직'일 수밖에 없고, 조직이 생겨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정치와 조직적 편가름은 인간이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공부 그룹에서 가르치던, 좀 더 본질적인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 기대치가 높았을 수밖에 없다. (교회 커뮤니티 내에선 나를 '지하교회 사파'로 반 농담, 진담으로 교회 커뮤니티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좌파로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고, 생명을 얻었으며, 이 생명을 나누는데 내 남은 인생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그 뿌리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이 부분은 인정을 해야 했다. 미국에서의 변두리 생활보다, 한국에 돌아와 실제 '시민'으로서 세금을 납부하고, 정치적인 변화에 바로바로 피부로 느끼면서 실제로 국가와 사회 안에서의 삶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어렸고, 학생이었고, 국가와 사회, 커뮤니티라는 것의 좁은 개념만 이해하고 체험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른으로서 좀 더 넓은, 현실적인 세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불과 작년에 발생한, 최순실과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내가 만약 학생이고 성경공부 그룹의 가르침만을 따랐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만 따랐다면 어땠을까. 충분히 편견이 있을만한 이야기지만, 보통은 주님을 신뢰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실제로 그 '기다림'에 대해 충분히 존경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면 정말 세상이 바뀔까?


이 문제에 대해선 역시 아마도 20,000 가지 이상의 토론과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신자/비신자들 모두 모여 2박 3일로 토론해도 끝나지 않을 문제다. 일단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내가 말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부터 공격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를 당신이 제대로 이해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글로 써 버리는 것은 교만한 태도다 어쩌고 저쩌고.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도가 부족한 신자의 비판 역시 그들도 받아들이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성경과 교회는 '글자'와 '문장'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글자에 대한 오해가 걱정된다면, 교회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쓰면 안 된다. 아님 처음부터 끝까지 마임으로 진행하든가.


내가 교회와 성경을 진지하게 믿는다는 집단에게 정이 떨어지고, 논리적으로도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바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다. 독일의 나치당이 집권할 시절의 비겁한 독일 가톨릭/기독교 집단이 있었다. 당시 종교 집단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으로는 나치당의 끔찍한 짓들에 대해 침묵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치당을 지지까지 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실화다.


너무 단편적인 예를 이으려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서 종교집단이 했던 태도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꼭, 종교인들의 집단, 그룹으로 소리를 내야 하냐, 개인으로서도 목소리를 내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순진무구했을 때, 종교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큰 의구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종교인이 사회참여에 대해 부정적이라면, 세금 내지 않는 것 OK, 그러면 모두 산으로 들어가시라. 산으로 가서 자급자족하시면서 가끔 와서 정신적으로 힐링하러 오는 교인들 도와주시고, 헌금받으시라.


http://m.mt.co.kr/renew/view.html?no=2016110114542119877&MVJ

역시 그 와중에 또 이렇게 목소리를 냈던 종교단체 분들도 계시다.


성경의 교리가 어떻고를 떠나서, 성경의 주인공(이라고 여겨지는) 예수만 생각해보자. 성경을 이해한다는 교역자, 신자, 신학교 교수분들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면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을까? 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실까? 물론 사회참여의 목적이 내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성경에서의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의 유대인 해방을 목적으로 사회참여 등으로 예수의 목적을 오해했던 것처럼). 그러나 예수의 목적을 아직 내가 더 알지 못하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더욱 삶으로 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분명한 것은, 이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셨을 거란 것이다. 저기, 비싼 서초동 땅에 백화점 같은 건물에 가서, 얼굴에 기름기 줄줄 흐르는 어떤 분과 비싼 오찬만을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나는 종교인의 특정 정치적 집단을 지지하는 행위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또는, 오히려 더더욱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과 정치집단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의 정치적 취향이나 선호도를 존중한다. 그러나, 좌/우를 떠나서 합리적 비합리적인 논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굉장히 똑똑해질 수도, 굉장히 멍청해지기도 쉽다. 특히 개인을 떠나 '집단'이 되면, 더더욱 멍청해지기 쉽게 된다.


예전에 나치당과 독일을 생각해보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고, 편협한 하나의 사실만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물론 가끔 어른분들 보면, 하나의 채널, 하나의 신문 매개체만 보시는 분들이 있기에 자연스레 폐쇄적인 정보전달만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이야기가 샜다.

주제는 종교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애초에 종교에 대해 기대치가 많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우리 스승과 선배들의 종교 집단으로서의 행동들이 있었기에, 조그마한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 처음 경험한 국가에 대한 실망,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로 (물론 그 전 세월호 참사도 있었지만) 종교집단에 대한 실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사태가 터졌고,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 분노를 행동으로 옮겼다. 종교 집단은? 흔히들 종교 집단 안에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동의할 수 없다. 정치적 중립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이야기가 많이 새고 글에도 주제가 없지만 내가 최근 살면서 이해하는 것은,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신을 믿으시는 분들도, 안 믿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한다. 그렇지만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넌센스다.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살길 바라지 않으신다. 그러나 종교 집단은 도대체 무얼 믿고 따르고 있는지 의문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만 보는 분들인가?


http://catholicpress.kr/m/view.php?idx=4179


오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는 기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순직한 교사분들 중, '기간제' 교사분들이 계셨다. 법적으로 현재 마련이 되지 않아 기간제 교사 분들의 의사자 인정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어버리신 그분들,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법적으로 그 당시까지 마련이 되지 않았었던 것 까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조명이 된 상태에서 충분히 법적으로 그분들의 순직을 위해, 합리적 정치적 토론을 통해 법적 처리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그 전 대통령의 내시 같던 정치인들이나,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정치적 이유인지 무엇인지 이러한 법적 처리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뭐,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1%도 이용하지 않았을 거란 내용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되받아 치지 말아야 할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당시 정부와 여당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정치적으로,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들을 외면했던 것처럼, 차갑게 외면했다.


위 기사에 따르면


김초원‧이지혜 교사는 ‘기간제’라는 이유로 참사 후 3년여의 시간이 지나도록 순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5월 스승의 날에 문재인 대통령이 “두 교사에 대한 순직 인정 절차를 진행하라”라고 주문하면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사혁신처는 ‘공무원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했고, 지난달 27일 문 대통령이 주재한 첫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중략)

순직 인정을 받은 두 교사의 유족들은 인사혁신처에 ‘위험직무 순직’ 보상 신청을 해 판단을 받게 된다. 앞서 참사 당시 희생된 단원고 정규 교사 7명은 ‘위험직무 순직’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인사처는 두 교사가 순직공무원으로 인정됐으므로 ‘위험직무순직보상심사위원회’를 열어 심사를 통해 위험직무 순직공무원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처리하고, 보상 및 지원 등을 조속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에 국회의원들의 여야 간 상의할 것도 없이 이런 방향으로도 처리가 될 수 있었던 문제다. 박근혜 정권에선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위 세월호 순직 기간제 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화가 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의 예 일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의 탓을 '종교'집단에만 돌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내가 비난하는 것은 '종교집단'도 에 대한 내용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은근슬쩍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설교 중에, 은연중에 이야기하지 말고, 솔직하게 밝히고 지지하고 정당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정치적 정당 활동이 아니어도 합리적/비합리적 상황에 대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고, 그렇지 않다면 역시 행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나.


종교인들은 종교의 추상적인 컨셉/아이디어에 대해서 굉장히 연역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용서, 자비 등에 대해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을 위에 올려놓고 이해하려 힘쓴다. 그렇게 어려운 교리와 추상적인 것들을 공부하고 나서, 실제의 삶에 연결시키려 애쓴다. 그것이 '봉사'를 통해 또 다른 '전도'를 통해 연결시키려 애쓰지만 그것이 당연히 쉽지 않다. 신학교에 가서 신학으 공부한 다음에, 오지에 가서 '하나님을 믿으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1번 가르침으로 여기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산다.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가르침 1번이다. 처음과 끝이다. 내 주변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살아가면서 알아보자. 더불어 살다 보면 밉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정도 쌓이고 또 싸우기도 하지만, 그렇게 더불어 살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된다. 더불어 살아봐야 뭔가를 알게 되지 않나.


종교의 논리에서 그 '살아가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상당히 교만한 태도다. 그런 측면에서 '신학'을 공부하거나 알고 있는 분들은 더더욱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이론'과 아주 다른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언제나 상호보완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동시에 실제를 해내는 노동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론을 앞세워 실제를 협박하면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종교는 이론을 무기로 실제를 협박하며 실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는 아주 대표적인 집단이다. 뭐, 어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특정 정치 정당이 자주 쓰는 수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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