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가 뭐길래
3년 전인가, 아는 형이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고 나는 별 관심도 없는데 말이 끊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기계식 키보드라서 샀는데, 타이핑 소리가 커서 연구소 안에서 사람들이 싫어한대나... 암튼 그때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공짜 키보드들이 널려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키보드는 아무거나 쓰지 왜 굳이 그렇게 따로 돈주고 사는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키보드가 뭐란 말인가. 그냥 회사에서 줄기차게 이메일 쓸 때, 채팅할 때, 필요한 것 아닌가? 니꺼 내꺼 바뀌어도 모르는것 아닌가. 입력 수단, 도구일 뿐인데 왜 이렇게 키보드 덕후들은 키보드에 열광하는 걸까? 왜 그냥 15000원짜리 번들 키보드로 만족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직장인이건 1인 기업가 건 , 하루 일하는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키보드와 마우스는 우리와 굉장히 많은 시간을, 아니 회사에 있는 동안 하루 종일 사용해야하는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비교로 보면, 잠잘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침대 매트리스와 배게가 될 것이다. 나 자신은 사실 침구류에 큰돈을 쓰지 않는 편이다. 직자생활을 하면서, 편한 배게 정도가 하루 6-8시간 소중한 나의 취침 퀄리티를 높여준다면 이제는 돈을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퀄리티의 수면을 가지느냐가 나의 하루 하루 컨디션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침구류에 돈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점들을 강조한다.
키보드도 마찬가지다. 회사 하루 최소 8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키보드와 마우스는 언급했던 직장인들의 침구류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나에게 꼭 맞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해야 피로감도 덜 들고, 오타율이 낮아짐으로써 짜증도 덜난다. 오버일 수도 있지만 업무 효율성이 좋아진다고 본다. 내가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반드시 직원들에게는 이 리얼포스 키보드와 고급 마우스를 원하는 사양으로 맞춰 주리라. (혹시라도 나중에 블로그에 돌아와 이 문구를 지우질 않기를...1년뒤에 다시 이 글로 돌아와 읽고 있고 채용을 생각중인데 이 글을 수정해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이야기를 되돌려보면 2년 전으로 돌아간다. 난 회사를 이직했고, 이직한 회사에서는 Dell에서 나오는 무거운 번들 마우스와 키보드를 주었다. 나름 1년 동안, 주어진대로 성실히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손목이 아프고 손가락에 무리가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더니, 유심히 관찰한 결과, 도대체가 이놈의 마우스는 쓸데없이 꽤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클릭감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키보드는 키 하나하나를 눌러야 하는 압력이 너무 세서, 손가락에 무리가 너무 많이 갔다. 세일즈 포지션인 관계로 이메일 타이핑을 정확하고 빠르게 쳐서 빨리 메일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오타가 나서 수정하고 다시 재 타이핑하는데 엄청난 짜쯩남과 시간낭비가 이어졌다. 장기적으로는 손가락에 무리가 가서 누가 말했을 때 믿지 않았던 키보드 업무 때문에 관절염으로 병원에 갔다는 것이 남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재빨리 검색 이후 나는 가성비가 좋은 2만 5천 원짜리 아이락스 키보드를 주문했다. 기존에 회사에서 사용하던 Dell 키보드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락스는 국내에서 꽤나 잘 팔리는 가성비 좋은 키보드 회사다. 꽤나 괜찮은 키보드를 괜찮은 가격에 만들어내는 귀여운 회사다.
시간이 지나고 아니나 다를까, 늦바람이 더 무섭다고 했었나...
회사 팀장님께서 일본 출장을 다녀오시더니 토프레 리얼포스 키보드를 사 왔다고 굉장히 좋아하셨다. 나와 팀장님은 공감대가 굉장히 비슷하기 때문에, 팀장님께서 관심을 가지는 곳에는 일부러라도 관심을 가진다. 팀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이 키보드의 가격은 국내에서 무려 36만 원, 그것도 국내에는 재고가 거의 없다고 하셨다. 일본에서는 직접 사게 되면 꽤 싸게 구매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를 업어오셨다. 팀장님 자리에서 데모를 시연해 봤는데 키감이 너무 좋았다.
내가 구매한 87U 버전은 사진과 같이 키 압력이 서로 다르다 (Unbalanced의 약자인 듯) 출처: EliteKeyboards.com
사진만 보면, 럭셔리 키보드같이 보이는데 필요한 백라이트도 없고 색도 단색으로 우중충하다. 그래서 그냥 회사 옆자리 김대리님이 과자 먹는 손으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번들 키보드같이 보일 위험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키캡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재질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리얼포스 토프레 키보드는 흔히 좋다는 기계식 키보드가 아니며 오히려 방식은 싸구려 멤브레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다만, 무접점 정전압(Electorstatic Capacitative) 키보드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무접점인 이유로 키보드 누름을 끝까지 하지 않아도 키가 먹힌다.
출처: 토프레
2.6mm가 눌러지는데 45G의 압력이 필요하며, 2.6 mm에 키 인식이 된다는 말인 것 같다. 거기에 필요한 압력은 약 45g 정도의 압력(힘). 오른쪽 사진을 보면 마운팅 플레이트가 스프링의 저항을 거쳐 눌러지면 보드의 capacitative sensor 가 동작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처음에는 여러 기계식 키보드를 단계별로 구매하여 구매 트리를 쌓아나가려고 했으나, 온라인상의 충고도 그렇고, 실제 회사에서 이 키보드를 쓰고 있는 다른 형님의 조언도 그렇고 한결같이
어차피 끝에 가면 이 키보드를 사용하게 된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방에 가라!
'그래 어차피 결국 이 키보드를 사기까지 여러 다른 키보드에 돈을 쓰게 될 바에야 마지막 끝판왕 리얼포스 무접점 토프레 키보드를 구매하자'라는 자기합리화가 시작되었다. (최강의 키보드에는 해피해킹 키보드가 또 있다. 역시 토프레 기반) 사실 하이엔드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자기합리화의 논리는 거의 다 같다고 한다..
나는 미국의 엘리트 키보드 닷컴에서 구매 후, 미국에서 한국에 오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가져왔다. 이렇게 할 경우 약, 25만 원 정도로 국내 재고 가격 36만 원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물론 현재는 국내 재고가 없다고 한다)
환상적이다! 원래 하이엔드 제품을 쓰게 되면, 더 이상 예전 제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제품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전에 쓰던 제품이 별로였는가를 무서울 정도로 디테일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금 오버하자면, 이런 키보드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고객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더라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프로그래밍을 할 때도 나 같은 초짜 프로그래머의 느낌일 뿐이지만 함수 브래킷을 열 때의 키감과 소리로 인해 뭔가 프로그래밍이 더 잘되는 것 같다. (터무니없는 소리니 무시해 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독자분이 브런치 블로그 작가라면, 혹은 장문의 글을 쓰는 컴퓨터 사용자라면, 반드시 기계식 혹은 무접점 키보드를 사용해보길 권장한다. 우리 팀장님은 아래와 같이 표현하셨다.
키 하나를 타이핑할 때마다 뭔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무위키에서는 아래와 같이 작성이 되어 있다.
REALFORCE
키보드계의 롤스로이스
사무용으로는 이보다 좋은 키보드를 찾기 힘들다. 기계식 특유의 찰칵거리는 소음이 없어서 옆사람 눈치 볼 일이 없으며 키압이 낮아서 장시간 타이핑을 해도 피로가 적다. 하지만 소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저소음 버전이 아니라면 달그락거리고 찰캉거리는 소음이 난다. 소음의 정도는 멤브레인 키보드 수준. 일반 키보드를 쓰다 보면 손가락이 아픈 사람이라면 열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가격. -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