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스마트해지고 있는가
이미지 출처: 서울신문
아침에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에 일어난다. 세면 후, 우리는 아침을 간단히 먹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무슨 메시지가 왔나... 부모님, 배우자, 자녀들 모두 아침에 건성건성 간단한 대화를 오가며 자그마한 스크린에 집중한다. 버스 정류장까지 노래를 들으며 걸어간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따라서 웹툰을 켜서 본다. 버스에서도 눈은 조그만 스크린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지하철은 사람으로 꽉 차서, 도무지 공간이 없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좁은 공간에서까지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서로가 불편한 스킨십에 얽히게 됨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스크린을 포기하지 않는다.
직장에 도착해서도, 수시로 주식을 체크하는 직장인들, SNS 그리고 수시로 메신저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간에 화장실에 들어가도 큰 분을 떠나보내면서도, 평균 이상의 시간을 스마트폰과 함께 보낸다. 오후에는 중간에 바람을 쐬야 일이 잘되니까,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당연히 복귀 시간은 늦어진다. '아 오늘도 일이 진짜 많네'하면서, 야근을 하기도 한다. 퇴근을 하면서도 반복이다. 자기 전까지, 간단한 게임으로 새벽까지 스마트 폰을 놓지 않다가, 불가항력적으로 잠이 든다.
정말로, 진지하게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뇌는 더욱더 게을러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가까이할수록, 우리는 책에서 멀어진다. 능동적인 사고는 더 이상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간편한 UI와 자극적인 가벼운 콘텐츠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더 이상, 누군가와 진지하고 재밌는 대화의 시간보다, 스마트폰의 즐거움이 훨씬 효율적이다. 친구들을 굳이 만나지 않아도, SNS로 그들의 근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인들도 데이트를 하면서도, 1m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서로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당연히 그 안에 깊은 대화가 있을 수 없다.
출처: 대한민국 공익광고제
'나는 스마트폰의 노예까진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노예'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개탄스럽다. 스마트폰은 내게서 많은 즐거움을 앗아갔다. 독서의 즐거움, 이야기의 즐거움, 친구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넋두리, 토론, 가족과의 정겨운 대화 모두를 앗아갔다. 나는 이 스마트폰이 무섭다. facebook의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가, 이 세상 모두를 연결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소름이 끼쳤다. facebook 이 온라인에서 모두를 이어가고 있을 때, 현실에서의 우리는 점점 더 끊어지고 있다. '경험'보다, '관람'을 즐기며 모두가 게을러지고 있다. 밖에 나가 목소리를 내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보다, 동정심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ㅜㅜ' 표시를 해 준다. 불의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SNS에서 정의의 댓글로 그들을 심판한다. 진지하고 건강한 토론이 있기 보다는, 악성 댓글의 한 줄, 한 줄로 서로 인신공격을 마다하지 않으며, 하루 종일 기분을 나빠한다. 온라인 상에서 '적'을 더욱더 많이 만들어 나간다.
유럽에 가서도,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만나서는, 웬만하면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로를 쳐다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감명이 깊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보기 좋은 곳에 놓고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스마트폰을 보고 만지작 거리며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게 익숙하다.
인정하자. 깨끗하게. 나도 '노예'다.
그리고 방법을 찾자.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을 관람하며 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되찾아야 한다. 어렵다. 그래서 서로 도와야 한다. 서로 만나면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서로에게 집중해 보자. 출퇴근 시간에 작은 화면을 잠시 꺼두고, 그동안 무시했던 출근길의 바깥 모습들, 바람들을 느껴보자. 일하다 쉬러 나왔을 때, 가끔 하늘을 바라보고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자. 아침에 함께 일어난 가족, 배우자, 자녀들과 간단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자. 가끔 주말에는, 스마트폰을 꺼놓고, 책을 읽고 산책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