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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우보이 Mar 31. 2017

임종을 앞두고

외할머니는 설악산 흔들바위에서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 장사로 젊음을 바치셨다. 5살 손주인 나까지 합세해서 밀크셰이크랑 설악산 관광지도가 그려진 스카프를 팔았으니 거의 가족 총동원이라 부를 만했다. (등산에 땀을 닦아주고, 지도까지 그려진 스카프는 당시 꽤 인기가 많았다.)


이런걸 1000원에 팔았다. 

사진 출처: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pzP&articleno=15710273&_bloghome_menu=recenttext


외할머니는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산에서 주무시고 일 년에 두어 번 빼고는 내려오시는 일이 없었다. 산은 거칠다. 겨울엔 살이 베일 정도의 추위가 매섭게 떠나갈 생각을 안 하고, 비가 올 땐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 6살 땐가, 설악산 흔들바위 가게 쪽방에서 자는데 눈이 하도 많이 와서 눈에 갇혀 버리는 줄 알았다. 


평생을 산과 함께 사신 할머니는, 새로 온 깡패 스님의 텃새에 가게를 접고 떠나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여러 국립공원에서 합법적으로 가게를 운영해도 주지스님의 자리값을 내놓으라는 깡패짓에 여러 가게들이 문을 닫곤 했다. (돈을 내놓지 않자, 주지스님이 몰래 와서 아이스크림 기계 전원을 빼놓기도 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거칠게 살아온 그분은 산을 내려와 홀로 크던 마지막 외 손주를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키우셨다. 이모가 홀로 일을 해야 해서 어린 사촌 동생이 혼자 커야 했기 때문이다. 평생 치열하게 장사로 돈을 버셨지만 그의 노후는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돈 문제로 자식들 (이모들)과 트러블이 많았고, 대부분 자식들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걸 보고 자란 난, 부모님께 한 달에 한 번씩은 똑같은 말씀을 드린다. 


'돈이 없으면 좋고, 있어도 나와 내 동생에게 돌아오는 돈이 없도록 잘 쓰시라, 돈은 형제지간을 갈라놓는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할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그의 노년기에 함께 있어드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 나름대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분을 돌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한 번은, 집에 가는데 할머니께서 보조바퀴를 밀며 걷고 계셨다. 할머니는 울고 계셨다. 할머니, 난데 왜 우느냐고 여쭸더니 그냥 서러워서 운다고 하셨다. 늙음이 서럽고, 한이 많다고 하셨다. 출근길에 할머니를 다시 집에 모셔드리고 좋지 않은 마음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던 기억이 난다. 


이모들의 의견에 언제나 1번을 찍으시던 할머니는 나의 되지도 않는 설득에, 또 손주 사랑에 2번을 찍으시는 쾌거를 이루셨고,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셨다. 우리 동작 을에서 예전에 나경원 의원과 노회찬 의원이 보궐선거로 붙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의 설득에 세상에 4번 정의당 노회찬을 찍기도 하셨다. 


10년 전부터, 나의 말도 안 되는 설득에 열심히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하셨다. 할머니는 언제나 주일 점심의 식사 평을 내게 하시곤 했다. 감사하게도 동네 목사님 내외는 우리 할머니를 많이 챙겨주셨다. 원래 목사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람 좋으신 분들이 종종 발견될 때마다 놀란다. 



그런 할머니가 오늘 많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옷가지를 챙겨 바로 속초로 달려갔다. 꽤 오래 사셨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마지막 노년에 '평안'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모두가 바쁨으로 인해 '소외'받는 그 느낌, 언젠가 나도 느끼게 될 그 외로움과 서러움일까.


요양원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계셨다. 간신히 호흡을 하고 계셨고, 말씀을 하시거나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름 덩치가 있었던 우리 할머니는, 마지막의 모습이 너무나도 작고 초라했다. 목이 타실 것 같아 거즈에 물을 적셔 입에 물려 드렸다. 


마지막으로 자식들과 손주를 보고 인식하시는지 눈동자를 나와, 다른 자식들과 힘겹게 마주치셨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알 수 없다. 나는 특별한 말을 나누지 않았다. 할머니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어떤 손자보다 할머니와 깊은 교감을 가졌던 나라고 생각을 해서였을까. 할머니 이 세상에서 워낙 고생하셨으니, 하늘에 가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 반복해서 평소에 말씀을 드려서였을까. 나는 할머니를 잘 쳐다보고 미소를 보여 주었다. 


'할머니 지금 이 순간이 어떻나요. 무섭나요. 할머니, 나도 금방 갈게요. 외로워하지 말아요. 열심히 살다가 곧 따라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임종을 앞둔 할머니를 보며 기도했다. 주님께서 온전히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할머니를 안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시 한번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곱씹어 봤다. 내가 지금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돌아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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