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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기정 Feb 12. 2019

허풍 혹은 허세

특이한 인간 폴스타프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 중 가장 독특하고 재미있는 인물이 폴스타프입니다. 폴스타프와 뗄 수 없는 인물이 핼 왕자인데 그는 나중에 영국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성공적인 왕인 헨리 5세가 됩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핼 왕자가 상당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그립니다. 방탕한 생활의 극 중 파트너가 폴스타프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부왕인 헨리 4세는 왕자가 자기와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정치에 관여를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핼 왕자는 실제로도 약간의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핼 왕자의 방탕한 행적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폴스타프라는 인물과 함께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이야기지요.    


폴스타프는 중년을 지난 뚱보에 술꾼에다가 난봉꾼입니다. 신분은 기사이지만 외모도 시원치 않고 재산도 없으며 거주지도 분명치 않은 놈팡이 노인에 가깝습니다. 그가 젊은 왕자의 놀이 상대가 되어 친구처럼 허물없이 어울리도록 설정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면 시대적으로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왕자와 어울리기에 적당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폴스타프는 어떻게 왕자와 친하게 되었을까요?  폴스타프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본질적으로 재치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재치 있게 만든다니까."


이 대사는 허풍끼가 농후하기는 하지만 일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폴스타프의 개성은 <헨리 4세> 1, 2 편에서 두드러지는데 주인공인 헨리 4세 나 핼 왕자보다도 연극적으로는 더 비중이 높은 인물입니다. 폴스타프는 직업이 자칭 도둑입니다. 어느 날 그는 졸개들과 함께 장사꾼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매복해서 돈과 물건을 탈취합니다. 핼 왕자는 다른 폴스타프의 졸개 포인스를 데리고 강도질을 숨어서 보고 있다가 폴스타프 일행을 기습해서 그들이 장물을 포기하고 도망가게 합니다. 그들 모두는 나중에 단골 술집에 모이는데 폴스타프는 10명 이상을 상대해서 사내가 된 이후로 가장 잘 싸웠다는 등, 상대가 모두 겁쟁이더라는 등 허풍을 떨며 무용담을 꾸며댑니다. 한참 허풍을 들어주던 핼 왕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이서 다 봤다.  너희들 넷이서 네 명을  습격해서 묶어놓고는 물건을 약탈하는 장면을 말이야. 다음 말을 들으면 찍소리 못할 거야. 우리 둘이 기습하니까 너희들은 한마디도 못하고 물건을 버리고 도망을 치더군. 여기 가져왔으니까 보여줄까?...."


폴스타프의 놀라운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유롭게 입을 놀리는 재주입니다. 그의 다음 대사를 보면 폴스타프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네인 줄 알았어. 자 들어봐. 내 손으로 왕세자를 죽이겠나? 자네도 내가 헤라클레스만큼 용감하다는 걸 알 거야. 하지만 본능을 생각해 봐. 사자도 왕세자를 건드리지는 않아. 본능이란 위대한 거야. 그때 나는 본능에 따라 비겁했던 거지. 나나 자네나 인생에 있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네. 나는 용맹한 사자고 자네는 진정한 왕자 아닌가. 그건 그렇고 그 돈을 여기 가져왔다니 반갑군...."


그는 상황을 모면하는 변명을 하면서도 돈을 가져왔다는 말에 기뻐하는 실리적인 인물입니다. 폴스타프는 지식이 풍부하며 표현은 저속하지만 핵심을 찌르며 생각은 자유롭습니다. 그는 결함이 많은 인물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감각적이며 개성적인 인물입니다. 사실 결함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하는 짓을 보면 범죄자입니다. 그는 기사 신분이기 때문에 핼 왕자를 따라 전투에도 참가하는데 병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고 징병을 빼주기도 하며 이를 자랑처럼 주변에 떠벌입니다. 막상 전투에 나가서는 싸움을 하다가 죽은 척 가장을 해서 목숨을 건지기도 합니다. 폴스타프는 자기 행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은 척하는 것은 살기 위한 거니까 속임수가 아냐. 오히려 삶의 진정한 모습이지. 용기란 대개 분별심과 관련된 거지. 조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난 것 아닌가..."  


그는 명예나 용기에 대해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인과 가깝습니다. 그는 핼 왕자에 찔려 쓰러진 왕자의 라이벌 핫스퍼를 발견하고 시체가 다시 살아나 자기를 찌를까 봐 두려워 여러 차례 자기 칼로 다시 찌르고는 어깨에 둘러메고 핼 왕자에게 가서 공을 세웠으니 포상으로 공작이나 백작의 작위를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청합니다.


폴스타프는 단골 주막의 주모 퀴클리 부인에게도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습니다. 퀴클리 부인이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을 치자 왕자님에게 천 파운드를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퀴클리 부인이 핼 왕자가 왔을 때 이 이야기를 하자 핼은 깜짝 놀라서 내가 천 파운드를 빌렸냐고 추궁하니 폴스타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핼, 천 파운드가 아니라 백만 파운드지. 자네가 받는 사랑은 백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어. 자네는 내 사랑을 빚지고 있네."


폴스타프의 임기응변과 너스레는 놀랍지 않나요? 왕자가 자기에게 사랑을 빚지고 있다니 대단합니다. 그는 악인에 가까운 인물인데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그의 인간적인 결함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폴스타프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유로움과 뻔뻔함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고 하고 싶은 말을 나오는 대로 뱉어내는 재주가 부럽습니다. 자유란 물론 타인에게 해가 안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폴스타프의 자유로움은 진정한 자유는 아닙니다만 그는 핼 왕자라는 배경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사고를 치면 핼 왕자는 표 안 나게 어느 정도 해결을 해줍니다. 앞에 얘기했던 강도 사건도 핼 왕자가 해결해 준 바 있습니다. 왕자가 그의 일행과 어울린 것은 왕이 되기 위한 수업 과정에서 폴스타프로부터 배울 점이 꽤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핼 왕자는 폴스타프를 통해 서민들의 언어와 사고방식, 그들의 요구사항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헨리 5세로 왕위에 오를 때 그는 폴스타프를 쳐냅니다. 폴스타프의 인간적인 결함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헨리 5세는 그가 통치에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요.


폴스타프는 극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매우 재미있는 일화와 반짝이는 재치를 쉬지 않고 제공하는데 그의 자유로운 연극적 재능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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