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정치인이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주요 소재중 하나가 권력인데 그의 작품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권력이 등장합니다. 권력이란 휘두르는 맛이 강해서일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크든 작든 자기의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능력 이상으로 그걸 휘두르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가가 분수를 지키며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게 훌륭한 정치가는 아주 드물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사심 없는 권력자의 대표로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존 왕>에 등장하는 배스터드 필립 Bastard Philip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능력 있고 사심 없는 지도자입니다. 배스터드란 서자를 뜻하는데 필립은 <리어왕>에 등장하는 에드먼드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서자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서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재미있는데, 서자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강한 욕정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더 좋은 체격과 우수한 형질을 가졌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서자가 기골이 장대하고 더 잘 생겼을 뿐 아니라 머리도 좋은 거지요.
존 왕은 왕위 서열이 앞선 조카 아서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귀족 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존 왕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교황의 권력에 의존합니다. 교황의 대리인인 추기경의 압력에 한때는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나중에는 비굴할 정도로 굴복하고 꼬리를 내립니다.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봐도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존 왕은 말만 앞설 뿐 줏대가 없고 리더십이 약한 인물입니다. 배스터드 필립은 외모가 사자왕 윌리암을 너무나 닮아 엘리노어 대비가 그의 사생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래서 배스터드 필립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고 공을 세우며 리더십을 가지게 됩니다. 필립은 국가적 명분 앞에서도 이득에 따라 행동하는 권력자들 - 영국 왕뿐 아니라 프랑스 왕, 로마의 추기경 - 을 경멸합니다. 필립은 이해관계에 따라 간사하게 행동하는 인간 본성을 이렇게 꿰뚫어 봅니다. 이익이라는 놈을 매도하는 이유를 말하는 대목은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 겸 철저한 자기반성 같지 않습니까?
"저 억지웃음을 짓는 신사, 이익이라는 이름의 간사한 놈...
변심하게 하는 놈, 교활한 악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뚜쟁이...
하지만 나는 왜 이익이라는 놈을 매도하는 거지?
아직 놈이 나에게 접근해 온 적이 없기 때문이지."
이 대사는 칼 마르크스에게도 인상 깊었는지 그의 저서인 <자본론>에도 인용됩니다.
존 왕은 조카인 아서를 죽이라고 신하에게 명하는데 아서는 도망가다가 성벽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귀족들은 분노하여 들고일어납니다. 존 왕은 권위를 잃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휘권을 필립에게 양도합니다. 존 왕의 무능에 비해 왕의 역할을 대행하는 필립은 패기와 뛰어난 판단력으로 프랑스와 맞섭니다. 왕이 중심을 잃고 무너질 때 필립은 충성심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영국을 지켜냅니다. 존 왕은 독약을 먹고 세상을 떠나며 어린 왕자에게 왕위를 이양하는 유언을 남깁니다. 필립은 새로운 왕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필립이 마음만 먹었으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였는데 전혀 사심이 없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덧없는 거라는 사실을 필립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헨리 3세의 존재는 극 중에서 그전까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는데 필립의 사심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셰익스피어의 의도였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