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보통 겉으로 보이는 지위나 재력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양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가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하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 속물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속물적 성향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성인 반열에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셰익스피어는 귀족 위주의 사회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헛된 명예심이나 속물근성을가진사람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속물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스놉 snob은 그 시대에는 없었습니다만 속물근성은 셰익스피어의 단골 소재입니다. 지위나 돈이 있는 사람이 과시하는 것은 품위가 없는 일이고, 없는 사람이 있는 척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이며 이들은 셰익스피어에게 가장 큰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입니다.
속물이라는 개념은 사회가 점점 평등화되면서 확대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속물 인간은 귀족사회에도 있기는 했지만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양산되기 시작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개인의 이익이 최우선적인 행동지침이 되는 오늘날에야말로 셰익스피어가 속물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직원들에게 함부로 하는 재벌이나 안하무인의 정치인, '내가 누군지 알아' 식의 좀 있는 사람들, 별 거 없으면서도 있는 사람과 힘 있는 분들을 흉내 내는 보통 사람들 모두 속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과시하는 것도 해당되겠군요. 상당히 유명한 학자이며 좋은 저서도 많이 내지만 속물 소리를 들어 마땅한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자칭 천재, 자칭 거장들 어떻게 보세요? 속물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몇 달치 월급으로 명품 백을 사는 여자의 마음, 집은 좋은 집에 못 살아도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남자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끔 부리는 허영 정도는 보통 사람이 대개 가지니까요. 그런데 상위 계층의 속물근성은 큰 문제가 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폐단은 커집니다. 최악의 국정농단은 최상위층의 속물근성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이 모자란 게 조그만 권력이라도 있으면 실제 가지고 있는 권력의 크기보다 더 크게 과시하고 싶나 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본 경험이 있을 텐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시나요? 이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속으로 그런 속물근성을 비웃고 나면 일종의 정신적 우월감을 일시적으로 느낄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에 대표적인 속물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속물 인간은 사실 많이 등장하는데 저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건의 동기를 제공하는 인물 바싸니오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의 사업가 친구인 안토니오가 가슴살 1 파운드를 담보로 샤일록으로부터 3000 두카토의 사채를 얻는 얘기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바싸니오가 미모의 부자여인 포샤에게 청혼하기 위한 자금입니다. 안토니오는 국제도시 베니스에서 무역을 하는 사업가인데 그의 모든 자금이 화물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풍랑으로 여러 척의 선박이 좌초 위기에 있다는 소식에 안토니오는 노심초사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친구의 목숨을 담보로 구혼 자금으로 수억 원의 사채를 얻어달라고 하겠습니까? 바싸니오는 귀족 출신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사실 무일푼의 신세입니다. 우리 가요에 나오는 빈대떡 신사가 생각납니다.
돈이 많고 신분이 높은 여인 포샤와 결혼하려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신분상승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그는 구혼에 성공해서 포샤의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는 샤일록과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가짜 판사가 된 포샤가 재판 중 샤일록에게 '대지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는데 방청석에 있던 바싸니오가 원금의 두배, 아니 열 배까지도 변상하겠다고 말합니다. 방청객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자기 돈도 아닌데 어떻게 두 배 심지어 열 배까지 변상하겠다고 하는 건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포샤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쓰겠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선언할 수 있나요?
옳지만 개인적으로 손해가 될 수 있는 일과 그르지만 이익이 되는 일 중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군자나 선비의 정신, 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다면 전자를 택하겠지만 보통은 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 누구나 속물근성은 비겁한 일이라고 경멸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상현실의 사회에서 상류층을 갈망하는 욕망이 화려한 겉모습만 추구하다 보니 공무원의 비리나 승츠비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흥미 위주의 방송이 속물근성을 부추기는 거 아닌지 우려됩니다. SNS도 개인적인 행복 과시나 말초적인 흥미를 끄는데 이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 생각 없이 유행을 따라 편하게 주고 받는 정보도 나쁠 건 없지만 너무 가벼운 쪽으로만 흥미 위주로 흘러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티브이를 바보상자라 했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이 바보폰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