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더불어 글을 가장 잘 쓴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자가 쓴 책은 대개 문학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이 쓴 책은 문학으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출판업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자신의 원고에서 구두점 하나도 빼거나 더하지 말고, 글자 하나도 고치지 말라고 했더군요. 자신이 출판한 책이 많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항상 독자들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을 때만 글을 썼다. 만일 이 원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켜진다면 서적의 양은 크게 감소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서도 허세에 가까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스스로를 천재라고 선언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실제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평을 날렸습니다. 당대의 유명 철학자인 헤겔을 사이비 철학자라고 칭하며, ‘칸트와 자신 사이의 시기에는 어떤 철학도 없었고 대학에서 이루어진 야바위만 있었을 뿐이다’고 그의 책에 썼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쇼펜하우어의 표현은 무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톨스토이가 쇼펜하우어의 초상을 걸어놓고 그를 천재로 인정했다고 하니까 뭔가 있기는 한가 봅니다. 셰익스피어마저 자연스러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다고 폄하했던 톨스토이가 인정했던 쇼펜하우어이고 보면 그의 문장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일 터입니다.
쇼펜하우어를 흔히 염세 철학자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가 과연 인간과 세상을 혐오하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쇼펜하우어의 에세이 모음집인 <부록과 남은 이야기 Parerga und Paralipomena>를 보면 그가 인간과 세상을 보았던 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30년간 지속된 철학적 사고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 체계에 포함시킬 수 없던 글들을 총정리해서 6년간의 작업 끝에 대중성을 띈 에세이집을 완성했다는 편지와 함께 두 권으로 예정한 이 책 원고를 자신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냈던 출판사에 보냅니다. 이때 쇼펜하우어는 62세였고 앞으로 새로운 저작은 출판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이미 다 썼으므로 더 이상의 저서는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단한 자부심 아닙니까? 그런데 이 출판업자는 웬일인지 출판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출판사를 통해 그다음 해 겨우 650부를 찍게 됩니다. 인세는 한 푼도 못 받고 말이지요. 실제로 그는 이후에 새로운 저서를 쓰지 않고, 몇 개 되지 않는 기존의 주요 저작들을 손보며 10년 정도를 더 살게 됩니다. 이 책은 부제가 ‘철학적 단상’ 정도의 의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인생론>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지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원전 그대로가 아니라 발췌하고 순서를 바꾸는 등 상당한 변형을 가해서 쇼펜하우어가 살아서 이런 번역본을 본다면 기겁할 일입니다.
쇼펜하우어 스스로 얘기한 대로 이 책은 대중에게 공통된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철학적 논평을 하는데 촌철살인과 위트로 가득해서 읽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 많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젊었을 때 철학자가 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삶은 불쾌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했다.”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건 싯다르타뿐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이 얘기했지요. 쇼펜하우어는 행복이 직간접적으로 고뇌를 가져오며 쾌락은 고통을 낳는 함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과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직시했을 뿐입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데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아주 현실적입니다.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만을 놓고 보면 모든 개인의 삶은 항상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희극의 성격을 갖는다.”
쇼펜하우어가 단테의 <신곡>에 대해 논평한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낌이 확 옵니다. 말하자면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이 지옥이라는 심각한 얘기인데 이 글을 처음 보고 왜 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촌철살인이 따로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차례대로 여행하는 내용인데 실제 읽어보면 쇼펜하우어의 논평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제 세계가 아니라면 단테가 어디서 그의 지옥 소재를 취할 수 있었을까? 그는 지옥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반면에 천국과 기쁨을 묘사해야 하는 과업에 이르자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런 소재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명쾌 그 자체입니다. 의미의 불확정성, 즉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점이 문학의 묘미라고 하는데, 쇼펜하우어의 글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이 투명합니다. 스피노자의 글에 대한 논평은 그의 스타일을 말해줍니다.
“스피노자를 읽으면 감탄과 짜증 사이를 오가게 된다.”
<에티카 Ethica>를 읽으면서 저도 난감한 적이 많았는데 스피노자의 글에 대한 논평 중 이렇게 명쾌한 게 또 있을까요? 독창적인 방식의 획기적인 철학 책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쇼펜하우어는 글 쓰는 작업을 상당히 숭고한 일이라고 여겨서 함부로 쓰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고전 읽기를 권했는데 주요 이유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신간을 읽는 건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형편없는 많은 작가들이 먹고사는 건 신간이 아니면 읽지 않는 어리석은 독자들 덕분이다.”
쇼펜하우어는 기회가 있었지만 대학 교수직을 사양했습니다. 직장을 가지고 급여를 받으면 자유로운 저작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봤지요. 그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종교였습니다. 그는 약간의 유산이 있었고 부자는 아니었습니다만, 굳이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는 돈을 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것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쇼펜하우어는 심지어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고전을 번역하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파괴에 대해서 심할 정도로 엄격했는데 번역으로 원래의 언어가 파괴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고전어나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원전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해당 언어를 배워서 읽거나, 능력이 안 되면 읽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그 지적 오만과 자신감에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가 스스로 대중적이라고 말한 수필집에서도 라틴어나 그리스 원전의 인용은 모두 원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의 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도록 쓰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의미심장한 생각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쇼펜하우어가 당대의 철학자 중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의 글은 복잡하고 어렵기로 유명하지요. 인기 철학 교수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교수도 아닌 쇼펜하우어로부터 사이비 철학자 소리를 듣는 헤겔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쇼펜하우어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독서를 권합니다. 설득력이나, 표현력, 상상력, 비유, 대담성과 신랄함, 간결함, 재치, 순수함 등 문학적 자질은 그러한 특성을 가진 책을 읽는다고 해도 즉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그러한 잠재적 자질을 깨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는데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또 작가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삼류 작가는 주변 인물뿐 아니라 주인공에도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하며, 이류 작가는 주인공을 자기 자신으로 변신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고 일류 작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인물을 자기 자신으로 완벽하게 변신시킨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글을 보면 확실히 솔직하고 꾸밈이 없습니다. 글을 쓴 사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배워야 할 점은 멋있게 보이거나 잘 보이려고 장식이나 가식을 더하지 않는 점입니다. 쇼펜하우어의 화법이나 사교 방식은 인간관계에서 그다지 원만하게 작동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장은 어느 철학자의 글보다도 이해하기 쉽고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멋진 표현이나 절묘한 비유보다 더 좋은 것은 쓴 사람의 진심이 담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