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저는 고교 시절에 읽었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김동리의 <등신불>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후 단편소설은 일부러 찾아서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로맹 가리 Romain Gary라는 프랑스 작가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보고 단편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단편소설이 지속적인 재미를 주기에는 뭔가 미흡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책 읽을 시간이 적은 현대인에게는 단편소설이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맹 가리는 외교관이며 작가였습니다. 에밀 아자르 Emil Azar라는 별도의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예상인 공쿠르 상을 두 번째로 받은 독특한 경력의 작가입니다. 공쿠르 상은 한 작가가 두 번은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의 소설은 외교관 생활 덕분인지 배경도 소재도 여러 나라에 걸쳐 다양합니다. 그의 단편은 대개 강렬하게 시작해서 의외의 반전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장도 독특하고 이야기의 전개가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시각적입니다. 스토리는 외교관답지 않게 어두운 경우가 많은데 인간 세상의 본질이 그렇다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일까요. 단편소설은 길이가 짧기 때문에 한 가지 이야기와 한 가지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메시지가 더욱 강력합니다. 문학이란 해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데, 단편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짧으면서 강렬한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 언급한 단편집에 실려 있는 ‘류트’나 ‘어떤 휴머니스트’는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류트’는 터키에 근무하는 외교관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시간이 나면 골동품 상점에 갑니다. 예술품을 감상하며 즐기는데 한 번도 물건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뭔가 완벽에는 조금 못 미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늘 물건은 사지 않으면서 자주 골동품 상점에 가는 남편을 보고 부인은 구경만 하고 사지 않으면 시중에 좋지 않은 평판이 날 수 있으니 뭔가를 사라고 조언합니다. 이 부인은 고위 외교관으로서의 평판을 중시합니다. 어느 날 외교관이 뭔가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가게에 갑니다. 가게 주인의 남자 조카가 현악기 류트를 연주하는 걸 봅니다. 그리고 류트를 하나 보고 대단한 예술품이라며 구입합니다. 그리고 류트 연주를 가르칠 선생을 가게 주인에게 소개해 달라고 합니다. 가게 주인은 자신의 조카가 훌륭한 연주자라며 소개합니다. 외교관은 자신의 집에서 류트 연주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류트 교습 시간에 밖에서는 부인이 항상 청각을 곤두세우고 관찰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장롱에서 자신의 류트를 꺼내 눈물을 흘리며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남편의 방에서 류트의 연주가 멈추곤 하는 걸 알아챈 뒤입니다. 눈물의 이유는 남편의 외교관으로서의 평판에 흠이 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동성애자인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작가는 그런 사실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독자로서도 끝까지 주의 깊게 읽지 않고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반전의 결말이 충격적입니다. 다 읽고 나서야 아 그런 게 암시였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어떤 휴머니스트’는 나치 시절 독일의 장난감 회사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며 신사이고 책을 사랑합니다. 사장에게는 충실한 독일인 집사가 있습니다. 책과 예술을 함께 나누는 친구입니다.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고 친구들이 해외로 피하라고 권유하지만 유태인 사장은 독일에 그냥 머물다가 때를 놓칩니다. 독일인 집사는 집의 지하에 도피 시설을 만듭니다. 영화 기생충의 지하와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회사 명의를 독일인 집사의 이름으로 바꿔놓고 사장은 지하시설로 도피합니다. 독일인 집사는 훗날을 위해 자신은 위임받은 사람이니 소유권에 대한 계약을 따로 하자고 하지만 유태인 사장은 친구 사이에 그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사장은 지하실에서 나치 치하의 세월을 보내고 집사는 회사를 잘 운영해서 번창합니다. 사장은 라디오와 신문을 보다가 지쳐서 그마저 끊습니다. 몇 년이 그렇게 지나서 나치가 멸망하고 예전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지 않는 건 유태인 사장과 집사의 위치뿐입니다. 시대와 단절된 유태인 사장에게 독일인 집사는 나치의 멸망을 알리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일까요?
단편 소설은 문자 그대로 짧은 이야기입니다. 영어로도 Short Story이지요. 소설은 영어로 Novel이라고 하는데, 단편소설은 novel로 부르지 않고 짧은 이야기로 부르는 것은 조금 푸대접받는 느낌입니다. 안톤 체호프는 현대 단편소설의 아버지라 할 만한 작가입니다. 체홉이 없이 그 이후 단편소설을 이야기하기 곤란할 정도라고 합니다. 체홉이 구축한 소박한 진실 이야기의 전통은 헤밍웨이를 거쳐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나 앨리스 먼로 Alice Munro에게로 이어집니다.
체홉은 대단한 사상이나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늘 보통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담하게 그렸습니다. 체홉은 의사였습니다. 작가로서의 시점도 의사가 환자를 보듯이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볼뿐입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유로운 예술가이고자 했답니다. 실제와 희망 사이의 괴리를 있는 그대로 그리면서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입니다. 특별하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지만 사소한 소재가 소설이 되며 독자들은 그 조그만 세계 안에서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짓과 모든 형태의 폭력을 증오한다. 나에게 가장 신성한 것은 거짓과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단편소설은 짧기 때문에 대개는 하나의 사건과 그에 관련되는 소수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체홉의 소설 중 <어느 관리의 죽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서너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단편 치고도 짧은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정부의 관리입니다. 이 사람이 오페라 관람을 하던 중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침이 튀는 게 사건의 시작입니다. 주인공이 재채기를 한 후 주변을 살피는데 앞좌석에 대머리와 목덜미를 장갑으로 닦고 있는 사람이 정부 부처 장관 중 한 사람인 겁니다. 주인공은 당황해서 앞으로 몸을 기울여 사과를 합니다. 장관은 언짢지만 어쩌겠습니까? 사과를 반복하자 괜찮다며 공연 중이니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주인공은 이제 오페라의 행복감은 느낄 수 없습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중간 휴식 시간이 되자 조심스럽게 장관에게 다가가 다시 용서해달라고 빕니다. 장관은 이미 다 잊은 일을 가지고 자꾸 같은 말을 할 거냐고 짜증을 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장관의 짜증 난 표정만 떠올라 어쩔 줄 모르다가 다음날 장관실로 찾아가 다시 해명하고 용서를 받기로 합니다. 민원인들 사이에 줄을 섰다가 차례가 되어 다시 어제의 일은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자 장관은 나를 놀리는 거냐고 하며 더 이상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다시 집에 옵니다. 이제는 장관이 놀리느냐고 한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음날 다시 장관을 찾아갑니다. 감히 장관님을 놀리다니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다시 사과를 하려니 이제 장관은 버럭 화를 내며 당장 나가라고 합니다. 그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 그대로 죽습니다. 죽는 과정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아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 모두가 혼자만의 생각은 이와 같이 때때로 너무 어리석어서 지나고 나서는 어이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인은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음에 이를 정도이지만 아무도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단편소설은 이와 같이 단순한 사건을 소재로 해서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등장인물의 깊은 심리나 복합적인 관계를 다루기에는 분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특징 때문에 단편소설이 갖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고 작가의 메시지가 단번에 꽂힙니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주로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미국의 서민이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서민의 아픔과 따뜻한 인간애를 그린 소설이 많습니다. 작가 스스로가 서민 출신이고 알코올 중독에 걸리는 등 순탄하지 않은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찍 결혼을 해서 가난한 생활이 더욱 가난해졌는데 낮에는 점원으로 일하고 야간 대학을 다니며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존 가드너 John Gardner가 유명한 작가가 되기 전에 교수로 있던 치코 Chico 주립대학으로 옮긴 것이 작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존 가드너로부터 문학 정신을 제대로 배우게 된 것이지요. 카버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소재로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 일상어로 소설을 썼습니다. 간결하고 단단한 그의 문체는 미국에서 헤밍웨이 이후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해서 그의 단편집을 일본어로 번역도 했고 한 번은 그를 일본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가 건강이 나빠져서 일본을 방문하지 못하고 결국 폐암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해서 건강을 해쳤던 모양입니다. 고생을 많이 했던 작가의 공감 능력이 따뜻하게 자신의 소설에 표현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성당>이라는 단편집이 레이먼드 카버의 성공작인데 이 안에 실려 있는 ‘대성당’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주인공의 아내는 맹인을 돕는 자원봉사를 했었는데 그때 만났던 맹인이 10년 만에 이들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동안 아내가 이 맹인과 죽 연락을 취하며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다는 걸 안 주인공은 질투심을 느낌과 동시에 방문객이 탐탁지 않습니다. 낯선 곳에 온 맹인 방문객의 행동은 주인공의 편견과는 달리 유쾌하고 능숙하기만 합니다. 마음이 닫혀있는 주인공과는 달리 맹인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열린 대화는 유머러스합니다. 주인공이 오히려 어색해져서 맹인에게 시위를 하듯 TV를 켭니다. 아내가 맹인에게 집에 TV가 있냐고 물어봅니다. 맹인은 칼라 TV와 흑백 TV 두 대나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대화는 독자의 미소를 자아냅니다. 밤은 깊어가고 이 둘은 TV 채널을 바꿔가며 대화를 이어 갑니다. 맹인은 어느 채널이든 상관없다며 TV를 같이 보게 되는데 화면에 대성당이 나옵니다. 참, 맹인은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거군요. 맹인은 주인공에게 대성당이 어떤 건지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주인공은 난감하지만 이런저런 모양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설명하다가 지친 주인공은 자기는 사실 대성당에 실제 가본 적도 없고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맹인은 주인공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와 같이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손을 포개고 함께 그리기 시작합니다. 기다란 사각형을 그리고 그 위에 지붕을 그리고 첨탑을 그려 나갑니다. 주인공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맹인이 멋지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맹인이 주인공에게 눈을 감고 그려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동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이렇게 따뜻한 단편소설이 가능하다니 놀랍습니다.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여류 작가입니다. 이미지가 우리의 박완서 작가와 비슷합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연령대도 그렇고 일상생활을 담담하고 정교하게 그려내는 기법까지 그렇습니다. 주로 등장인물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공통점입니다. 다른 점은 앨리스 먼로가 주로 단편소설을 썼다는 점입니다. 단편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는 앨리스 먼로가 처음이었는데 2013년도의 일입니다. 그녀의 소설 중 ‘런어웨이’는 가장 찬사를 많이 받은 작품인데 우리말로는 ‘떠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혼한 주인공 여자가 비정한 남편이 싫어서 이웃집 여자에게 도움을 청해 도망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집 여자는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이 여자가 이러저러한 사정이니 네가 좀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도피자금까지 들려 보내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주인공 여자는 정작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삶이란 떠날 수 없다는 것일까요? 비밀리에 도와주었던 이웃집 여자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 남편이 그녀의 물건을 돌려주러 와서 자기 아내를 앞으로는 만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이블린'도 삶이 고단한 아일랜드 처녀의 이야기인데 아르헨티나의 선원을 만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려다가 배가 떠나기 직전에 포기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이 비슷한 느낌으로, 허무한 결말이지만 삶의 무게는 그러하다는 걸 얘기하는 듯합니다.
<런어웨이>에 실린 다른 작품 ‘트릭’은 우연과 착각,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스토리의 전개와 극적인 반전이 기발합니다. 누군가가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닌데 등장인물들의 행로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어떤 속임수가 있을까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라’하는 푸시킨의 시가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유도 모르는 채 좌절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냥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나중에라도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행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좌절과 아픔의 이유를 알게 되는 건 너무 늦었을 때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의 번역판 <떠남>에는 ‘트릭’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번역본에 의하면 문화적인 차이가 느껴지는 3개 작품은 빼고 출판했다는데 아쉬운 결정입니다.
단편소설로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쓴 ‘무무’입니다. 강신주 작가가 쓴 <감정수업>의 첫 번째 꼭지로 인용된 걸 보고 내용이 감명 깊어서 일부러 찾아 읽었습니다. 무무는 주인공이 키우던 개의 이름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게라심은 귀머거리 노예입니다.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세서 몇 사람 몫을 하니 주인에게는 최고의 노예입니다. 하지만 노예는 자기 의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여주인은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 결혼을 시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은 어느 날 구덩이에 빠져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구해주고 곁에 키우기 시작합니다. 여자를 뺏긴 남자에게 무무는 큰 위안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는 무무를 죽이려고 합니다. 강아지에 불과하지만 노예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던 거지요. 주인공은 자신의 개가 여주인에 의해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무무를 죽이기로 합니다. 무무가 가장 좋아하는 밥을 마지막으로 먹이고 배에 태워 강으로 나갑니다. 벽돌을 개의 몸에 묶고 물에 던집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여주인으로부터 도망칩니다. 개를 강물에 던진 순간 그는 노예의 비굴함까지 함께 벗어던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유인으로 살려고 합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앞으로는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겠지요. 단편소설도 이렇게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 소름 돋는 독서였습니다. 단편소설의 세계도 무궁무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