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만들면 된다.
필요하면 다 찾아 하게 되어 있다.
보츠와나에서 앙버터를 만들어 보자.
빵이 맛없는 보츠와나에서 단팥빵이 먹고 싶어 졌다.
한국에 있을 때도 단팥빵, 단팥 찹쌀 도넛, 앙버터 등 팥 들어간 빵을 즐겨 먹었다. 노인네 같은 입맛인 줄은 알지만 어려서부터 좋아했으니 나이와 관련 있는 취향은 아니다. 팥빵뿐 아니라 팥빙수나 팥죽도 좋아하는데, 무작정 단 건 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슈퍼에서 파는 빵은 너무 달아 맛이 없더라. 팥소에서 팥 맛은 안 나고 찐득한 질감에 단 맛만 나서 그런 것 같다.
대전에 사는(살았던) 나는 성심당에 자주 갔다. 시내에서 약속이 있으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 빵을 한 두 개 사 먹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약속이 끝나고라도 성심당에 들렀다. 성심당에는 빵 종류도 많고 맛도 보장되기 때문에 뭘 사도 맛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팥빵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음... 뭐, 그냥 그렇네'하는 수준. 물론 이곳은 튀김 소보로가 더 유명하고 그 속에 단팥이 들어 있기는 하다만, 너무 느끼해서 두 개를 먹고 나면 속이 편하지 않았다. 딱 하나만, 아메리카노랑 먹으면 훌륭하지 싶다.
잠시 서울에서 살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입구역에 장 블랑제리라고 유명한 골목 빵집이 있다. 이제는 골목 빵집이라기에는 너무 유명하고 판매량이 많아서 기업형 빵집이 되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에 위치한 빵집이라, 버스 기다리는 김에 빵이나 사자하고 들어가 이것저것 산 적이 많았다. 기숙사에서 룸메랑 나눠 먹기도 했고, 학생 식당에서 밥은 안 사 먹고 빵을 먹는 일이 많았다. 반대로, 빵 사다가 버스 놓치겠다 싶어서 쟁반에 올려둔 빵을 다시 내려놓고 빵집을 나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가게는 작은데 줄이 너무 길어 빵을 고르고 계산을 마치기 까지 30분이 넘게 걸리는 일이 흔했다.
이 빵집을 먹여 살리는 메뉴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팥빵이다. 계산대가 4개쯤 있는데, 이 중 하나는 단팥빵 전용 계산대일 정도. '단팥빵 15개 주세요' 하면 15개만 후딱 포장해 준다. 여기서는 다른 빵을 계산할 수도 없으니 줄도 비교적 짧기 때문에 단팥빵이 당기면 이 줄에 서서 '3개만 주세요'라고 주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빵은 하나에 1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3000원쯤으로 가격을 올려도 사 먹을 의향이 있다. 빵이 기분 좋게 묵직하기 때문이다. 손바닥 만한 크기여서 엄청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얇은 빵 반죽 사이에 팥소를 하도 빵빵하게 채워 놓아서 빵이 묵직하다. 적당한 당도의 팥소에 잣이나 호두 등이 알맞게 섞여 있어서 식감도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밥 대신 먹었던 게 여러 번이었다. 여자 친구가 나를 만나러 서울까지 오면 돌아갈 때 집에 어른들 드리라고 한 봉지 사다 들려 보내는 일도 많았다.
여기서 2년 간 열심히 빵을 사 먹고 나서는 다른 빵집에 가서도 빵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손에 빵을 올려 무게를 느껴보고는 '아, 장 블랑제리만 못하네'라고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단팥빵이 먹고 싶다고, 여기서, 보츠와나서.
이놈의 보츠와나는 정말이지 음식이 지랄 맞다.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숙련도와 기능의 문제임을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불평했었다.
하지만 성숙한 우리는 불평을 자제하여야 한다. 아무 이득이 없는 불평불만은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차라리 불평할 시간에 무엇을 바꿀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다. 나도 아는데, 훌륭한 사람은 개나 주라지. 아 진짜 지랄 맞다.
각설하고, 단팥빵이 먹고 싶어 졌다. 먹고 싶어 졌다기보다 꾸준히 먹던 걸 못 먹게 되었으니 뭔가 아쉽다. 단팥빵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단팥을 삶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씻고, 끓이고, 으깨고, 설탕 넣고 끝이었다.
당장에 가보로네로 가서 중국 마트에 방문한다. 'Red bean 주시오'. 팥 2kg을 사다가 반으로 나누고 호기롭게 1kg을 냄비에 들이부었다.
1. 박박 씻는다.
2. 처음 끓인 물은 떫은맛이 나니 버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만, 좀 더 찾아보니 계속 끓이고 설탕을 넣으면 떫은맛이 나는 성분이 파괴된다고 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과학적인 설명을 택하기보다 다수의 '카더라'를 채택한다. 나란 놈은 이래서 발전이 없는 것 같다.
3. 중불, 약불로 차례로 줄여가며 계속 끓인다. 1kg은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새벽 1시다.
4.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을 들이붓는다. 계속 저어가며 끓인다.
5. 블렌더가 있다면 최고겠지만 난 그런 게 없으므로 저 구멍 뚫린 국자로 팥을 으깬다. 아까부터 후회했다. 새벽 2시에 가까워진다.
6. 새벽 두 시가 넘어서 끝났다. 11시쯤 시작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팥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한참을 끓여도 물러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참고한 레시피들을 다시 보니 200g이나 300g을 삶았더라. 5~3배를 삶았으니 시간도 그만큼 더 걸리는 게 맞았던 것이다. 내일 출근 준비가 힘들 것 같다. 디테일을 놓치면 큰 일을 놓치더라. 나란 놈은 이래서 발전이 없는가 보다.
7. 이미 늦었다. 빵이라도 먹어보자. 단팥빵을 만들 반죽 같은 거는 시작도 못했다. 팥소는 오늘 만들고 반죽은 내일 하려고 했다. 단팥빵은 미뤄두고, 마트에서 사 온 빵으로 앙버터를 만들어 보았다.
8. 그래 이 맛이다.
사실 팥 끓이면서 계속 퍼먹기는 했다. 끓인 팥만 먹어도 나름의 풍미가 좋았다. 설탕을 넣고 거의 완성 단계가 되어 가면서는 한참을 퍼먹었다. 적당하게 잘 만들어졌다. 요리 효능감이 대폭 향상되었다.
급하게 만든 앙버터도 훌륭했다. 달달한 팥과 고소한 버터는 언제나 훌륭한 조합이다. 빵이 바게트나 라우겐 같은 단단한 빵이 아니라 스펀지 같은 식감이라 아쉽긴 했다. 반죽은 다른 날 시간 내서 도전해 봐야겠다.
9. 먹다 남은 팥은 먹을 만큼 덜어서 냉장 칸에, 그러고도 남은 건 냉동 칸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뒤 가만 생각해보니 파파타(phaphata)를 갈라 그 사이에 끼워 먹으면 더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파타는 보츠와나에서 주식으로 먹는 빵 중 하나인데,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 간만 해 화덕에 구운 빵을 말한다.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단순한 맛이라 바게트 같은 빵을 훌륭하게 대체할 수 있지 싶었다. 첫날 해먹은 스펀지 같은 식감의 핫도그 빵보다는 담백한 맛과 묵직하게 씹히는 질감이 잘 어울렸다.
별 걸 다 해 먹네 싶지만, 별 걸 다 해 먹어 가며 살아야 잘 산다고 본다. 다음번엔 좀 더 어려운 걸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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