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밥 해먹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파노 Jul 07. 2019

보츠와나에서 앙버터를 만들어보자.

없으면 만들면 된다.

필요하면 다 찾아 하게 되어 있다.

 보츠와나에서 앙버터를 만들어 보자.



빵이 맛없는 보츠와나에서 단팥빵이 먹고 싶어 졌다.

 한국에 있을 때도 단팥빵, 단팥 찹쌀 도넛, 앙버터 등 팥 들어간 빵을 즐겨 먹었다. 노인네 같은 입맛인 줄은 알지만 어려서부터 좋아했으니 나이와 관련 있는 취향은 아니다. 팥빵뿐 아니라 팥빙수나 팥죽도 좋아하는데, 무작정 단 건 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슈퍼에서 파는 빵은 너무 달아 맛이 없더라. 팥소에서 팥 맛은 안 나고 찐득한 질감에 단 맛만 나서 그런 것 같다.



 대전에 사는(살았던) 나는 성심당에 자주 갔다. 시내에서 약속이 있으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 빵을 한 두 개 사 먹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약속이 끝나고라도 성심당에 들렀다. 성심당에는 빵 종류도 많고 맛도 보장되기 때문에 뭘 사도 맛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팥빵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음... 뭐, 그냥 그렇네'하는 수준. 물론 이곳은 튀김 소보로가 더 유명하고 그 속에 단팥이 들어 있기는 하다만, 너무 느끼해서 두 개를 먹고 나면 속이 편하지 않았다. 딱 하나만, 아메리카노랑 먹으면 훌륭하지 싶다.



 잠시 서울에서 살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입구역에 장 블랑제리라고 유명한 골목 빵집이 있다. 이제는 골목 빵집이라기에는 너무 유명하고 판매량이 많아서 기업형 빵집이 되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에 위치한 빵집이라, 버스 기다리는 김에 빵이나 사자하고 들어가 이것저것 산 적이 많았다. 기숙사에서 룸메랑 나눠 먹기도 했고, 학생 식당에서 밥은 안 사 먹고 빵을 먹는 일이 많았다. 반대로, 빵 사다가 버스 놓치겠다 싶어서 쟁반에 올려둔 빵을 다시 내려놓고 빵집을 나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가게는 작은데 줄이 너무 길어 빵을 고르고 계산을 마치기 까지 30분이 넘게 걸리는 일이 흔했다.

 이 빵집을 먹여 살리는 메뉴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팥빵이다. 계산대가 4개쯤 있는데, 이 중 하나는 단팥빵 전용 계산대일 정도. '단팥빵 15개 주세요' 하면 15개만 후딱 포장해 준다. 여기서는 다른 빵을 계산할 수도 없으니 줄도 비교적 짧기 때문에 단팥빵이 당기면 이 줄에 서서 '3개만 주세요'라고 주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빵은 하나에 1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3000원쯤으로 가격을 올려도 사 먹을 의향이 있다. 빵이 기분 좋게 묵직하기 때문이다. 손바닥 만한 크기여서 엄청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얇은 빵 반죽 사이에 팥소를 하도 빵빵하게 채워 놓아서 빵이 묵직하다. 적당한 당도의 팥소에 잣이나 호두 등이 알맞게 섞여 있어서 식감도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밥 대신 먹었던 게 여러 번이었다. 여자 친구가 나를 만나러 서울까지 오면 돌아갈 때 집에 어른들 드리라고 한 봉지 사다 들려 보내는 일도 많았다.

 여기서 2년 간 열심히 빵을 사 먹고 나서는 다른 빵집에 가서도 빵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손에 빵을 올려 무게를 느껴보고는 '아, 장 블랑제리만 못하네'라고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단팥빵이 먹고 싶다고, 여기서, 보츠와나서.

 이놈의 보츠와나는 정말이지 음식이 지랄 맞다.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숙련도와 기능의 문제임을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불평했었다. 

 하지만 성숙한 우리는 불평을 자제하여야 한다. 아무 이득이 없는 불평불만은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차라리 불평할 시간에 무엇을 바꿀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다. 나도 아는데, 훌륭한 사람은 개나 주라지. 아 진짜 지랄 맞다.

 각설하고, 단팥빵이 먹고 싶어 졌다. 먹고 싶어 졌다기보다 꾸준히 먹던 걸 못 먹게 되었으니 뭔가 아쉽다. 단팥빵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단팥을 삶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씻고, 끓이고, 으깨고, 설탕 넣고 끝이었다.

 당장에 가보로네로 가서 중국 마트에 방문한다. 'Red bean 주시오'. 팥 2kg을 사다가 반으로 나누고 호기롭게 1kg을 냄비에 들이부었다.


1. 박박 씻는다.                     

먼저, 팥을 씻는다. 씨눈이라 해야 할까? 가운데 흰 줄이 떨어져 나오더라.



2. 처음 끓인 물은 떫은맛이 나니 버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만, 좀 더 찾아보니 계속 끓이고 설탕을 넣으면 떫은맛이 나는 성분이 파괴된다고 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과학적인 설명을 택하기보다 다수의 '카더라'를 채택한다. 나란 놈은 이래서 발전이 없는 것 같다.

팥은 단단했고, 생각보다 오래 끓여야 했다.


3. 중불, 약불로 차례로 줄여가며 계속 끓인다. 1kg은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새벽 1시다.                    

이제야 팥이 물러지나 보다.


4.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을 들이붓는다. 계속 저어가며 끓인다.                    

설탕과 물엿을 함께 넣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물엿을 넣어야 완성되었을 때 윤기와 적당한 점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설탕만 넣었더니 완성품이 조금만 말라도 바스러진다.


5. 블렌더가 있다면 최고겠지만 난 그런 게 없으므로 저 구멍 뚫린 국자로 팥을 으깬다. 아까부터 후회했다. 새벽 2시에 가까워진다.                    

으깨는 일도 한참이다. 1kg은 미련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6. 새벽 두 시가 넘어서 끝났다. 11시쯤 시작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팥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한참을 끓여도 물러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참고한 레시피들을 다시 보니 200g이나 300g을 삶았더라. 5~3배를 삶았으니 시간도 그만큼 더 걸리는 게 맞았던 것이다. 내일 출근 준비가 힘들 것 같다. 디테일을 놓치면 큰 일을 놓치더라. 나란 놈은 이래서 발전이 없는가 보다.

요 정도 비주얼이면 완성


7. 이미 늦었다. 빵이라도 먹어보자. 단팥빵을 만들 반죽 같은 거는 시작도 못했다. 팥소는 오늘 만들고 반죽은 내일 하려고 했다. 단팥빵은 미뤄두고, 마트에서 사 온 빵으로 앙버터를 만들어 보았다.                    

앙버터는 훌륭했다.


8. 그래 이 맛이다.

 사실 팥 끓이면서 계속 퍼먹기는 했다. 끓인 팥만 먹어도 나름의 풍미가 좋았다. 설탕을 넣고 거의 완성 단계가 되어 가면서는 한참을 퍼먹었다. 적당하게 잘 만들어졌다. 요리 효능감이 대폭 향상되었다.

 급하게 만든 앙버터도 훌륭했다. 달달한 팥과 고소한 버터는 언제나 훌륭한 조합이다. 빵이 바게트나 라우겐 같은 단단한 빵이 아니라 스펀지 같은 식감이라 아쉽긴 했다. 반죽은 다른 날 시간 내서 도전해 봐야겠다.



9. 먹다 남은 팥은 먹을 만큼 덜어서 냉장 칸에, 그러고도 남은 건 냉동 칸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뒤 가만 생각해보니 파파타(phaphata)를 갈라 그 사이에 끼워 먹으면 더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파타는 보츠와나에서 주식으로 먹는 빵 중 하나인데,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 간만 해 화덕에 구운 빵을 말한다.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단순한 맛이라 바게트 같은 빵을 훌륭하게 대체할 수 있지 싶었다. 첫날 해먹은 스펀지 같은 식감의 핫도그 빵보다는 담백한 맛과 묵직하게 씹히는 질감이 잘 어울렸다.

파파타+단팥+버터 = 보츠와나 앙버터. 버터 남은 걸 털어 넣다 보니 모양새가 좋지는 않지만, 맛은 훌륭했다.


별 걸 다 해 먹네 싶지만, 별 걸 다 해 먹어 가며 살아야 잘 산다고 본다. 다음번엔 좀 더 어려운 걸 만들어 봐야겠다.




블로그

https://kopanobw.blogspot.com/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pj2nw6kYkRBvKfueWfSNA/videos


매거진의 이전글 밥? 한국에 있을 땐 안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